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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인문학의 제도화 : 1910~1959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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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한국 근현대 인문학의 제도화: 1910~1959/ 신주백 편
개인저자신주백, 편
이준식= 李俊植
장신
정준영
강명숙
박종린
판원 룡태= 板垣 龍太, 1972-
발행사항서울: 혜안, 2014
형태사항428 p.; 24 cm
총서명사회인문학총서
ISBN9788984945043
일반주기 공저자: 신주백, 이준식, 장신, 정준영, 강명숙, 박종린, 이타가키 류타
서지주기참고문헌(p. 411-421)과 색인수록
기금정보주기이 저서는 2008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분류기호001.3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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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한국 근현대 인문학은 ‘知의 식민성’의 제도화 구축과 저항의 역사였다

이 책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인문한국(HK)사업단에서 기획하고, 한국근현대 전공 연구자들이 한국 인문학 및 대학의 위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그것의 역사화 작업을 진행해 왔던 공동연구의 결과물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인문학이라고 하면 주로 문학, 사학, 철학을 말한다. 줄여 문·사·철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학문의 분류 방식은 길게 잡아도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지식체계 속에서 오늘날과 다른 종합인문학을 추구였다. 그러나 계몽운동기 즈음부터 서구의 인문사회과학에 관한 지식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며 문학, 사학, 철학의 영역은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는 조선인 지식인 스스로가 이를 분류화하는 담론을 개발하는 계기였다. 조선사, 조선문학, 동양철학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1926년 경성제국대학이 창설되고 법문학부가 설치되어 식민지 조선에서 ‘관학 아카데미즘’이 본격화하면서 조선인이 정의한 조선의 문·사·철은 부정되었다. 대부분이 도쿄제국대학 출신인 법문...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한국 근현대 인문학은 ‘知의 식민성’의 제도화 구축과 저항의 역사였다

이 책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인문한국(HK)사업단에서 기획하고, 한국근현대 전공 연구자들이 한국 인문학 및 대학의 위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그것의 역사화 작업을 진행해 왔던 공동연구의 결과물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인문학이라고 하면 주로 문학, 사학, 철학을 말한다. 줄여 문·사·철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학문의 분류 방식은 길게 잡아도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지식체계 속에서 오늘날과 다른 종합인문학을 추구였다. 그러나 계몽운동기 즈음부터 서구의 인문사회과학에 관한 지식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며 문학, 사학, 철학의 영역은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는 조선인 지식인 스스로가 이를 분류화하는 담론을 개발하는 계기였다. 조선사, 조선문학, 동양철학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1926년 경성제국대학이 창설되고 법문학부가 설치되어 식민지 조선에서 ‘관학 아카데미즘’이 본격화하면서 조선인이 정의한 조선의 문·사·철은 부정되었다. 대부분이 도쿄제국대학 출신인 법문학부의 문학과·사학과·철학과 교수들은 학교 안에서 강좌제를 기반으로 연구와 교육에 집중하였다. 학교 밖에서도 청구학회 등에서의 학술활동과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관여하며 영속적인 지배이데올로기를 생산·전파하였다. 이들이 주조하는 식민지 공공성은 학문적 신념인 경우도 있었고, 국가에 의해 강제된 경우도 있었다. 국가는 교수들에게 신분을 보장해 주며 학문적 자율성을 제약했기 때문이다. 권력의 후원을 받는 교수들은 ‘과학’을 내세우며 조선어를 지배의 대상으로만 간주했으며, 조선인이 주체가 된 조선사를 부정하였다. 조선문학에서 한글을 배제했으며, 조선철학만이 아니라 동양철학조차 지나철학으로 간주하며 학문의 대상에서 배제하였다. 경성제대의 교수들은 통치이념이란 공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부정과 배제의 방법도 동원함으로써 공론(公論)을 내세워 공론(共論)은 없앤 것이다.
조선인은 경성제대를 나와도 그 대학에 남지 못했으며, ‘제도로서의 학문’을 추구했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경성제대가 주도하는 관학아카데미즘 내로 포섭되지도 못하였다. 학문의 길을 가려던 조선인 졸업생들은 조선총독부의 외곽기관에 취직한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 중등교원, 사립전문대학의 교수, 언론인 등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조선인 졸업생들이 배운 내용은 당시에도 그랬지만 해방 이후 각 분과학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주백과, 이준식, 장신의 글들에서 그 각각의 과정을 잘 알 수 있다.
경성제대를 졸업한 조선인 연구자들은 학자의 길로 들어서기 쉽지 않았으면서도 ‘과학적 근거’를 내세우며 조선의 역사와 언어, 사상 등을 학문의 대상으로 하는 조선학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1930년대 들어 조선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고조시켰다. 때마침 안재홍과 정인보가 주도하는 조선학운동이 일어나면서 대중적 관심은 더 높아갔다. 당시의 연구지형을 보면, 조선학을 둘러싼 학술장에는 크게 다섯 가지 경향의 부류가 있었다. 경성제대 출신 조선인 연구자는 실증주의를 내세운 진단학회에 가담한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양쪽에 가담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운동으로서의 학문’을 추구하였다. 조선학운동 주도자들이 생각하는 운동의 대상은 일제였지만, 경성제대의 조선인 출신자들이 생각하는 운동의 대상은 일제일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경성제대 출신자들에게 ‘과학적’이지 못한 사람들은 공통되게 운동의 대상이었다. 식민지 공공성에 대항하는 저항적 공공성이 그만큼 복잡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들은 이 책에 실린 정준영과 신주백의 글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해방 후 대학사회는 미군정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바뀌어 갔다. 제도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교육과 연구 기능을 주도할 제국대학이란 특권대학과 실업교육만을 전담하는 기관으로서의 전문학교라는 이중구조 자체가 철폐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고등교육기관 사이의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구조도 없어졌다는데 있다. 고등교육은 2개 이상의 단과대학을 기반으로 4년제의 종합대학이 담당하였다. 문리과대학은 ‘대학 중의 대학’으로 공인되어 교양교육과 기초학문을 담당하였다. 제국대학을 받쳐주는 기본은 연구를 중심으로 연구와 교육을 결합시킨 강좌제였다면, 해방 후 미국식 대학시스템에서의 기본은 교육을 중심으로 연구와 교육을 결합시킨 학과제였다. 그리고 그 상위에 학문후속세대를 육성할 대학원이 위치하였다.
미국식 대학제도에 따라 경성제국대학과 각종 관립전문학교가 통합되어 서울대학교가 세워졌고, 조선인 전문학교는 모두 4년제 종합대학으로 전환했으며, 수많은 대학이 전국 각지에 신설되었다. 이에 따라 교수사회에서 신분, 지역, 학문간 이동이 매우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이사회를 중심으로 대학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 갔다.(정준영과 강명숙의 글)
고려대, 동국대, 서울대, 연희대(연세대) 등 대학에서 국어국문학, 역사학, 철학분야의 연구와 교육을 담당한 사람들은 주로 경성제대 출신이었으며, 일본의 제국대학과 와세다대학 출신자도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교수들은 대학 시절에 배운 내용과 경험을 바탕으로 학과를 운영하고 수업을 진행하였다. 사학과에서 국사·동양사·서양사의 3분과체제, 국어학에서 한글운동의 계보를 잇는 언어민족주의의 소외, 동양철학의 사실상 배제와 서양철학 중심의 교과운영은 대표적인 ‘지(知)의 식민성’이었다. 서울대학교 사학과의 운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국식 학과제에서는 존립 자체가 어려웠던 강좌제도 흔적을 남기며 수업내용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인간관계까지 규정하였다.
대학 교양과목의 교재는 1950년대 들어서면서 여러 종류가 발행되었다. 교양교재 자체가 수업 이외에도 대학입시와 고시 등에도 사용될 수 있어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공수업의 교재는 달랐다. 경제사정도 있고, 식민지 때부터 축적된 학문이 부족했기 때문에 교재를 개발하고, 이에 기초하여 수업을 진행하기는 사실상 쉽지 않았다. 급히 외국서적을 번역하거나, 프린트물로 대체하며 전공수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교수 자신이 만든 카드를 음독(音讀)하며 설명하는 방식의 수업이 일반적이었다. 인문학 교과목의 커리큘럼에 ‘특강’과 ‘연습’이 많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었다.(장신과 박종린, 신주백, 이준식의 글)

분단과 냉전, 좌우대결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학계에서의 식민지 잔재는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였다. 인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제도적인 맥락도 고찰할 수 있는 학술장이 형성된 적도 없었다. 후진성 담론은 이를 정당화시켜주는 논리의 하나였다. 그것의 역사적·문화적 해명이 동양특수성 담론이었다.
비슷한 시기 북한에서도 ‘주체’가 강조되며 김일성 중심의 전통만이 유일한 혁명전통으로 받아들여졌다. 한글운동의 계보를 잇는 언어학은 민족자주성이란 이름으로만 살아남아 북한학계에서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타가키 류타의 ‘월북언어학자’ 김수경에 대한 연구는 그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필자들이 보는 한국 인문학에서의 새로운 움직임의 태동은 1950년대부터였다. 조선학의 전통을 학문적으로 계승하려는 움직임은 실학에 주목하고 민족주의사학을 말하였으며, 국학이란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1950년대라는 시점에서 그것은 매우 제한적인 움직임이었지만, 긴 시간의 학술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국학의 등장은 ‘비판적 한국학’의 명맥이 싹트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1960년대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는 내재적 발전에 입각한 관점과 태도가 확장되면서 역사학을 시작으로 관제적 공공성에 경합할 수 있는 공공성이 형성되어 갔다는 이후의 과정이 그것을 말해준다.
1960~1980년대 한국 인문학의 ‘知의 식민성’에 대한 저항과 극복의 과정들은 이 책에 이어 나오는 '권력과 학술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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