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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이야기 : 프로테스탄트의 시작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이야기

좌등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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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종교개혁 이야기: 프로테스탄트의 시작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이야기/ 사토 마사루 지음 ; 김소영 옮김
개인저자좌등 우= 佐藤 優, 1960-
김소영, 역
발행사항서울: 바다, 2016
형태사항505 p.; 22 cm
원서명宗教改革の物語 :近代、民族、国家の起源
ISBN9788955618259
일반주기 본서는 "宗教改革の物語 : 近代、民族、国家の起源. 2014."의 번역서임
서지주기참고문헌: p. 502-505
주제명(개인명)Hus, Jan,1369?-1415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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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얀 후스가 탄생시킨 두 가지……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민족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표논객이자 칼날 같은 사회비판으로 유명한 사토 마사루. 그가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15세기 종교개혁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흔히 루터와 칼뱅으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보다 백 년 전 보헤미아의 사제였던 얀 후스가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교황권에 대항하며 제대로 된 신앙을 부르짖다가 화형대의 잿더미로 사라진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저자는 신학자들로부터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로 일컬어지는 얀 후스의 사상과 투쟁을 되짚어본다. 그 방법으로 중세와 근대, 현대를 아우르는 후대 종교학자들이 쓴 다양한 원문을 아낌없이 교차로 인용하면서 얀 후스 및 당대 종교개혁 전후 사정을 객관적으로 풀어준다. 무엇보다 얀 후스의 종교투쟁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만이 아니라, 그제야 민족(네이션)이란 개념이 틀을 잡고 제대로 된 국가관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역사와 문헌을 되짚어 증명하고 있다.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그는 왜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주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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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얀 후스가 탄생시킨 두 가지……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민족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대표논객이자 칼날 같은 사회비판으로 유명한 사토 마사루. 그가 이번에는 특이하게도 15세기 종교개혁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흔히 루터와 칼뱅으로 대표되는 종교개혁으로만 알고 있지만, 그보다 백 년 전 보헤미아의 사제였던 얀 후스가 범접할 수 없는 절대 교황권에 대항하며 제대로 된 신앙을 부르짖다가 화형대의 잿더미로 사라진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저자는 신학자들로부터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로 일컬어지는 얀 후스의 사상과 투쟁을 되짚어본다. 그 방법으로 중세와 근대, 현대를 아우르는 후대 종교학자들이 쓴 다양한 원문을 아낌없이 교차로 인용하면서 얀 후스 및 당대 종교개혁 전후 사정을 객관적으로 풀어준다. 무엇보다 얀 후스의 종교투쟁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만이 아니라, 그제야 민족(네이션)이란 개념이 틀을 잡고 제대로 된 국가관이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역사와 문헌을 되짚어 증명하고 있다.

‘종교개혁 이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
그는 왜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주장했을까?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루터, 츠빙글리, 칼뱅…… 서양 중세기가 끝나고 근세가 시작되는 시기에 로마가톨릭교회에 맞서 종교개혁이라는 대역사를 만든 인물들이다. 하지만 보헤미아에서 출판된 16세기 문헌을 보면 위 인물들의 영향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세 컷으로 나눠진 그림의 맨 위에는 위클리프가 어둠 속에서 부싯돌로 불씨를 일으키는 모습이, 가운데 칸에는 얀 후스가 양초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마지막 칸에는 루터가 횃불로 세상을 밝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위클리프가 중세교회의 신앙관에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 선구적 이론가에 그쳤다면, 이 책의 주인공인 얀 후스는 훗날 루터로 대변되는 종교개혁 완성형 이전의 첫 교회 개혁가인 셈이다. 그것도 ‘실천적 개혁가’로 말이다.
보헤미아, 지금의 체코 출신이었던 얀 후스는 그저 안정적인 삶을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었지만, 막상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의 교회는 온갖 부조리의 장이었다. 기초학문인 철학은 신학이라는 절대권력에 무릎 꿇은 시녀가 되었고, 교황은 돈을 받고 극악한 범죄에 면제부를 내려주었으며, 악착같이 걷은 세금은 나라가

아닌 교회가 징수처였다. 초라한 옷에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이어 받은 자, 즉 신의 대리자라고 하는 교황은 화려한 3단 면류관을 쓰고 세상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후스는 강단에서, 설교단에서, 문서를 통해서 부패한 교회 현실을 비판하며, 오직 예수와 성서만을 근본으로 하는 초기그리스도교로 돌아가자고 호소하였다. 후스의 동향민이었던 체코인들도 로마 교황청 중심의 신앙에서 탈피하기 위해 자국어로 설교하는 등 후스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눈엣가시가 된 후스는 강제로 소환되어 굴욕적인 심문을 당하다가 결국 콘스탄츠 공의회 자리에서 화형에 처해지고 만다. 자기주장을 철회하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는 추기경들의 회유에도 그는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며 눈을 감았다.
얀 후스는 절대권력의 교황과 추기경들을 강하게 비판하며, ‘눈에 보이는 교회’에 다니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즉 제도적인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꼭 구원받으리라는 법은 없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교회에 소속되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그 구분이 쉽지 않다. 누가 구원의 대상이 되는지 아닌지를 사람이 판단할 수 없으며 곧 신만이 알고 있음을 후스는 확신했던 것이다.

후스에게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한 교회뿐이다. 그러나 누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는지는 인간의 힘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계를 가진 이 세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교회는 “예정된 자와 정죄(定罪)된 자들의 혼합,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죄된 자와 멸망할 자가 뒤섞인 예정된 자들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_ 277쪽

그리스도교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은 후스의 종교운동.
사회변혁으로, 그리고 ‘민족’ 개념의 탄생까지


종교개혁 역사에 있어 얀 후스가 더욱 전무후무한 인물로 기억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체코라는, 당시 비주류 민족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거론했던 영국의 위클리프나 독일의 루터, 프랑스의 칼뱅 등은 당시 서유럽 주류 국가 출신이어서 종교활동을 하는 데 민족적인 설움을 겪을 일은 없었다. 그와 달리 보헤미안인 체코 출신의 후스는 프라하대학의 학장으로 지냈던 당시에도 자국민보다는 독일인 교수와 학생들의 세력이 더 컸던 것에 대해 늘 저항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했

다. 라틴어로만 되어 있는 성서 교재를 버리고 체코어로 번역하여 다시 만들었고, 체코어로 설교하지 말라는 로마 교황청의 명령에 불복하며 의지를 이어나갔다.
설교와 저술로써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체코의 지식인들과 왕실, 일부 귀족, 그리고 많은 대중은 열렬히 환호했다. 이렇듯 후스는 체코 민족에게 종교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라는 사회적 아이덴티티를 부여해주는 역할을 해냈을 뿐만 아니라, 소외된 농민이나 하층 계급에게까지 자국 언어 및 눈높이에 맞춰 설교하는 등 소외된 자에게 사랑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 즉 초기 기독교 정신을 여실히 실천하였다. 그런 그의 행보를 거슬려했던 교황청에서 그를 공의회에 불러 불시에 처형하기까지 그는 체코 민족의 아버지에 다름 아니었다.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그의 화형 이후 체코인들은 ‘후스전쟁’을 일으켜 15년간 조직적인 전투를 곳곳에서 이어나갔고, 그의 기독교정신을 이어받은 모라비아 형제단은 ‘체코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세기 중반에 체코 민족의 아버지라 불린 프란치섹 파라츠키가 후스를 재해석함으로써 체코 민족을 형성했다. 후스에 의해 체코인은 독일인의 멍에로부터 헤어 나올 수 있었으며, 약속대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체코인의 나라를 건국하리라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1918년 토마슈 가릭 마사리크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슬로바키아와 칼파치아를 합해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을 건설했다. 이렇게 해서 신화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_100쪽

중세와 근대가 교차하는 서양사에서 종교개혁은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그리스도교의 역사 안에서만 국한되어 바라본다면 중세와 근대의 교차로에 왜 종교개혁이 놓여있는지를 모르고 넘어가게 된다. 예수가 아닌 교황, 즉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지배하던 한 시대가 끝난 것이 중세의 종말이며, 이제 제대로 된 예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함과 동시에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 민족’에 대한 개념의 탄생이 곧 근대의 시작을 알렸다(일반적인 역사 구분법에서는 17~18세기를 ‘근세’라고 하나 이 책의 저자는 이때부터를 근대라고 통합하여 부르고 있다). 오랫동안 ‘사회와 교회는 일체’라는 관념이 의심 받기 시작했고, 이 의심은 유럽사회에 분열을 일으킨다. 이 분열은 훗날 ‘네이션(민족)’이라는 강력한 아이덴티티로 뿌리내리는데, 이처럼 세계사에 민족을 탄생시킨 중요한 기원이 곧 후스의 종교개혁이었다.

일본의 인기 논객은 왜 얀 후스의 종교개혁에 주목했나?

이 책에서 다루는 종교개혁은 대부분의 역사 교과서에서 다뤄지는 루터나 칼뱅의 스토리를 전혀 담고 있지 않는다. 얀 후스 사상의 기저가 되었던 존 위클리프의 이론이 조금 소개되어 있지만 철저히 얀 후스의 교회관에 집중해 있다. 그렇다면 현재 일본의 베스트셀러 논픽션 작가이자 괴짜논객으로 불리는 사토 마사루는 왜 15세기 체코 종교개혁 이야기에 천착한 것일까? 그가 대학시절 신학을 전공하고, 러시아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중에도 러시아대학에서 변증법신학을 연구했던 이력만 보더라도 그가 이 주제를 다룬 점은 그리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머리말과 후기를 읽어보면 (물론 본문 곳곳에서도) 저자가 특별히 후스의 정신을 21세기에 다시 끌고 들어온 이유가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 이유는 본문 제4부의 ‘근대, 민족, 그리고 사랑’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
사토 마사루는 러시아대사관 외교분석관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의 북방영토 회복작전의 최전방에 서서 일했다. 영토반환이 코앞으로 다가올 정도로 패기 넘치게 일했던 그에게, 어느 날 배임 및 위계업무방해죄라는 명목으로 체포영장이 날아온다. 일본 정치세력 간의 정쟁과 우익세력의 반발이 뒤얽혀 일어난 올가미였다. 젊은 날을 오롯이 바친 외교관으로서의 인생도 끝났지만, 한편으로는 512일간 구류되어 무죄로 석방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출신과 과거,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 개신교도로서의 정체성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도 경험하였다. 그런 그에게 종교개혁과 사회변혁 모두를 일으킨 얀 후스는 가슴 벅찬 롤모델이 아닐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부패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이 어려서부터 접했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바른 믿음, 가톨릭 주류국과 주변 강대국의 위세에 눌려 모국어로 된 설교 한번 할 수 없었던 체코인의 설움을 눈물이 아닌 에너지로 바꾸었던 것이 얀 후스 아니었는가.
일본 우익세력의 반발로 외무성에서 쫓겨나간 사토 마사루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일본의 대표적 우익논객이다. 잘못된 부조리에 대해선 날선 비판을 가감 없이 쏟아내지만, 오키나와 출신의 어머니를 둔 자신의 근본적 핏줄의 영향에서 그는 벗어나지 못한다(현재 오키나와 섬이 처해진 위기상황에 대한 설명은 본문 426쪽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저자는 오키나와의 동정과 15세기 체코의 민족 개념 성립의 과정을 동일한 해석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책은 단순한 종교개혁 연구서가 아니다. 장을 거듭할수록 지난 역사와 현재 사회 읽기를 교차하는 폭넓은 인문서로 읽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체코(보헤미아)라는 출신지, 체코어라는 언어와 결부된 자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 자기의식은 후스전쟁을 통해 체코인이라는 강력한 에트니의 윤곽을 형성했고, 게다가 이 자기의식은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결과 프로테스탄티즘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그리고 이 체코 에트니라는 의식은 근대가 되자 체코인이 국가를 형성하는 민족의식의 모체가 되었다. ……곧 일본은 국가통합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합스부르크제국 안에서의 체코와 일본제국 안에서의 오키나와는 유사한 정황에 놓여 있다. _4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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