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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와 기계 : 기계적 예속 시대의 자본주의와 비기표적 기호계 주체성의 생산

Lazzarato,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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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기호와 기계 : 기계적 예속 시대의 자본주의와 비기표적 기호계 주체성의 생산 /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지음 ; 신병현, 심성보 옮김
개인저자Lazzarato, M. (Maurizio), 1955-
신병현, 1958-, 역
심성보, 1976-, 역
발행사항서울 : 갈무리, 2017
형태사항400 p. : 삽화 ; 21 cm
총서명아우또노미아 총서 ;55
원서명Signs, Machines, Subjectivité
기타표제번역표제: Signs and machines : capitalism and the production of subjectivity
ISBN9788961951678
일반주기 본서는 "Signs, Machines, Subjectivité. 2014."의 번역서임
서지주기참고문헌(p. 386-392)과 색인수록
일반주제명Capitalism --Philosoph
Subjectivity
분류기호330.12201
언어영어로 번역된 프랑스어 원작을 한국어로 중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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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출간의 의미

이 책은 이탈리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행동하는 지식인, 마우리치오 랏자라또가 지난 10년 동안 각종 사회적·정치적 현안과 이론적 문제에 개입한 흔적을 모은 글이다. 저자는 탈산업화 이후의 자본주의의 궤적을 구체적으로 추적하고, 신자유주의에서 배제된 사람들(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실업자, 빈민층 등)의 처지와 그들이 촉발한 투쟁과 운동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이를 위해서 랏자라또는 들뢰즈·가따리에서 바흐친 등을 거쳐 푸코에 이르는 이론적 자원에 의지하며, 이들 사상가를 계승하고 극복했다고 알려진 비판이론가들(지젝, 버틀러, 비르노, 바디우, 랑시에르 등)의 주장을 하나씩 비판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바야흐로 기계의 시대다. 작년에는 알파고의 충격으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면, 올해부터는 테슬라의 전기차와 자율주행차에 열광하고 곳곳에서 ‘4차 산업혁명’을 노래한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노동을 대체한다고 호들갑을 떨다가, 어느새 그런 두려움은 거대한 산업전환과 새로운 사업기회,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속에 사라진 것 같다.
인공...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출간의 의미

이 책은 이탈리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행동하는 지식인, 마우리치오 랏자라또가 지난 10년 동안 각종 사회적·정치적 현안과 이론적 문제에 개입한 흔적을 모은 글이다. 저자는 탈산업화 이후의 자본주의의 궤적을 구체적으로 추적하고, 신자유주의에서 배제된 사람들(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실업자, 빈민층 등)의 처지와 그들이 촉발한 투쟁과 운동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이를 위해서 랏자라또는 들뢰즈·가따리에서 바흐친 등을 거쳐 푸코에 이르는 이론적 자원에 의지하며, 이들 사상가를 계승하고 극복했다고 알려진 비판이론가들(지젝, 버틀러, 비르노, 바디우, 랑시에르 등)의 주장을 하나씩 비판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바야흐로 기계의 시대다. 작년에는 알파고의 충격으로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면, 올해부터는 테슬라의 전기차와 자율주행차에 열광하고 곳곳에서 ‘4차 산업혁명’을 노래한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노동을 대체한다고 호들갑을 떨다가, 어느새 그런 두려움은 거대한 산업전환과 새로운 사업기회,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속에 사라진 것 같다.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나는 새로운 기술을 찬양하는 유토피아적 비전이다. 더 정확히는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이 전지구적 금융위기 이후 좀처럼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는 자본의 수익(그리고 금융의 이윤)을 만회하기 위한 새로운 혁명이라는 것이다(그러나 일부 지역의 경기 회복은 다른 국가나 지역으로 위기를 떠넘기는 것에 불과하다).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인식된다. 새로운 기술로 어느 누구는 손해를 보지만 경제 전체로 봐서는 새로운 직업과 고용이 창출되기 때문에 고용 절벽도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반응 이면에는 그런 혁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디스토피아적 비관론이 존재한다. 이것은 ‘4차 산업혁명’이란 자본주의가 탄생한 이래 늘 있어 왔던 기계에 의한 인간의 대체에 불과하며, 따라서 자본과 기득권층에 ‘독점적’ 이윤을 보장할 뿐이지, 평범한 노동자, 소비자, 시민들에게 착취와 실업, 저임금, 불평등, 파편화되고 지루한 노동을 가져올 뿐이라는 비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금융자본의 성장이 보여주듯이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은 실물 경제의 생산성 증가와 고용의 증대에는 거의 영향력이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세계는 기계로 구성되어 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두 입장은 일견 어느 정도 현실 타당성이 있으며 그 나름대로의 과거 경험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과연 기계와 인간은 대립하거나 구분되는 존재인가? 기계는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존재일 뿐인가?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인간과 기계는 반드시 대립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인간과 기계는 상호접속하며, 심지어는 서로 구분되지도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인간중심적 사고와 실천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적어도 근대 자본주의 이래 인간보다는 기계가 인간을 이용했으며, 더 정확히는 인간 자체가 기계이고 기계 자체가 인간이었다.
이런 시각에는 기계와 인간에 대한 관점 전환이 내포되어 있다. 저자가 말하는 기계는 기술적 기계만이 아니라, 자신의 ‘환경’과 상호 접속하는 모든 존재, 예를 들어 화학적 결정체를 이루는 분자들에서부터 언표들을 거쳐 가족, 교육 등의 사회적 시스템까지 포함한다. 이런 측면에서 기계와 ‘환경’(또는 인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복수의 기계들이 존재하고, 이들 사이의 다양한 접속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저자는 들뢰즈·가따리의 표현을 빌려 이런 접속들의 연결, 분리, 통합을 기계, 또는 기계적 배치라고 부른다.
랏자라또에 따르면 아직 기계에 대한 이론화는 너무나 부족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주체/대상, 자연/문화의 대립을 의심하고 무효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기계는 기술의 부분집합이 아니라 인간 본질에 참여한다. 실제로 기계는 기술의 전제 조건”(116쪽)이라는 통찰이 가능해진다. 이런 관점에 서면 “공공 기관, 미디어, 복지국가 등의 장치도 … 인간, 절차, 기호계, 기술, 규칙 등”(117쪽)을 배치하는 기계이다.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의 주체성 생산 : 사회적 복종과 기계적 예속
랏자라또에 따르면 “자본주의 아래에서 주체성의 생산은 … 사회적 복종(social subjection)과 기계적 예속(machinic enslavement)”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사회적 복종은 “개체화된 주체”를 생산한다. 사회적 복종은 우리에게 성, 신체, 직업, 민족성 등을 할당한다. 사회적 복종은 노동의 사회적 분업 내에서, 그런 분업에 어울리는 개개인의 위치와 역할을 생산하고 분배한다.(32쪽)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에게 “인적 자본”과 “기업가형 자아”가 강요되었던 것, 그리고 그 명령이 차츰 ‘부채인간’으로 변형되었던 것이 사회적 복종의 예이다.
주체성 생산의 다른 축인 “기계적 예속”에서 개체는 “경제적 주체”(예를 들어서 인적 자본, 기업가형 자아, 시민)가 아니라 “기업” “금융시스템” “복지국가” “미디어” 등의 배치 속에 있는 하나의 부품으로 간주된다.(34쪽) 랏자라또에 따르면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가 이런 이중적 권력 장치를 정확히 묘사하였다. “복종은 개체들을 생산하고 지배하지만, 예속을 통해서는 ‘개체들이 … ‘분할 가능한 것’이 되고 대중들(masses)이 표본·데이터·시장·[자료] ‘은행’이 된다.”(35쪽)
“사회적 복종”과 “기계적 예속”은 랏자라또가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사용하는 핵심 개념들이다. 그는 이 두 가지 권력 장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주체성 생산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 『기호와 기계』가 두 장치의 차이와 상보성을 검토하고 “복종의 양식들과 예속의 양식들에 관한 지도제작을 추적”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장악한 주체성, 그것의 생산 양식, 삶의 양식들에서 벗어나 그것들과 무관한 자율적인 과정을 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쓴다.

기표적 기호계와 비기표적 기호계
사회적 복종과 기계적 예속은 서로 다른 기호계와 관련된다. 사회적 복종은 기표적 기호계, 특히 언어적 기호계를 동원하며, 의식을 겨냥한다. 그와 달리 기계적 예속은 비기표적 기호계를 동원한다. 비기표적 기호계는 예컨대 “주가지수, 통화, 방정식, 다이어그램, 컴퓨터 언어, 국민 계정, 기업 회계” 같은 것들이다. “비기표적 기호계는 의식과 재현에 관여하지 않으며 주체를 준거대상[지시대상]으로 삼지 않는다.”(55쪽)
우리가 사는 세계 자체가 기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부분들)도 일종의 기계들이 접속된 산물이다. 이런 기계들이 서로를 끌어들이고 밀어내고 결합하는 힘들의 작동방식, 그러니까 일종의 코드가 기호(기호계의 기능)이다. 여기서 기호는 언어적 표현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표현들, 예를 들어 소리, 냄새, 느낌, 전자, 분자 등의 신호들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다. 그것들은 비기표적으로, 우리의 의식이 의미로 인식하기도 전에 작동한다.
예를 들어 보자. 운전할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차를 몬다기보다는 발과 팔이 자동차의 일부처럼 ‘무의식적으로’, 즉 의식을 우회해서 작동한다. 우리의 의식적 주체는 수많은 부품들로 분해되어 자동차의 부품들과 어느 정도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개체화된 주체의 의식은 운전 중 어떤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할 때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례에서 우리는 “주체성의 이중화 과정을 최초로 경험”한다. 이것은 가따리가 『분열분석적 지도제작』(Schizoanalytic Cartographies)이라는 책에서 제시한 사례인데, 가따리는 이런 이중화 과정이 오늘날 “모든 기구와 제도가 작동하는 방식”(130쪽)이라고 본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는 비기표적 기호계와 기호적 기호계를 다양하게 흡수한 ‘혼합적 기호계’가 작동한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특히 언제나 기표적 기호계에 정복당해 잘 보이지 않는 비기표적 기호계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기계, 기구, 다이어그램, 방정식, 비기표적 기호계가 없다면 아마도 인간은 탈영토화 과정들을 이해하고 그것에 개입할 수 없는 “실어증자”가 될 것이다. 즉 그들은 이런 [기계 중심적] 세계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계 중심적 세계에서 말하고, 보고, 냄새 맡고, 행동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계들과 같은 편이 되어야 하며 비기표적 기호계와 같은 종류가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비기표적 기호계가 언표행위의 초점을 구성하고 주체화의 벡터를 구성하는 것이다.(130쪽)

공장이나 사무실이나, 주식 시장에서 움직일 때 우리는 의식을 가진 개인으로서 일한다기보다 손과 팔, 우리의 눈, 우리의 두뇌가 각종 장비, 모니터, 스크린과 접속해서 움직인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기술적 기계와 노동자의 상호작용을 살펴보자. 노동자는 자신의 의식 속에서는 기계를 하나의 대상으로 대할 수 있지만, 실제의 노동과정에서는 기계의 보철로 기능하고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로 변환된다. 공장에서 인간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에너지와 생리적 피로도, 동작과 시간의 독특한 리듬으로 분절되고 변형되어 기술적 기계(그리고 노동조직의 사회적 기계)의 부품이 된다.
또 우리는 빅데이터에서 다양한 정보 더미로 분해되고, 자신의 소비패턴, 신용정보, 재무상태, 정치성향 등으로 재조합된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금융시장에서 파생상품이 만들어지는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정보는 데이터 공학의 재료가 되어, 어느 순간 우량고객이 되거나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그 무엇도 아닌 어떤 주체의 형태로 표면에서 제시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회적·직업적 분업과 역할에 적응한 존재이기보다는 기계적으로 조합되는 존재(데이터로 변환된 존재)일지도 모른다.

자본주의도, 저항운동도, 주체성 발명에 실패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장기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새로운 체제는 1970년대 이후 수익률 하락에 직면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위로부터의 구조조정에 나섰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처럼 급격한 생산성 증가는 없었고, 금융자본으로 자본 내에서 분배를 옮겨간 것에 불과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신기술의 개발은 일시적 경기회복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이어졌다. 이런 시각은 전통적인 정치경제학적 비판이나 최근에 대두하고 있는 소득주도 성장론, 피케티 식의 자본주의 비판과 결론에서는 그리 다르지 않다.
저자 고유의 새로운 시각은 자본주의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생산력 자체를 증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체성의 생산, 또는 사회적 관계의 변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발전주의 시기에는 국민으로 대중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고, 신경제와 정보화 시대에는 기업가형 주체가 필요했으며 금융화 시대에는 금융 투자자(즉 빚을 얻어서 투자 포트폴리오를 운영하는 주체)인 ‘부채인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은 부채를 통한 금융화된 경제를 전제할 뿐만 아니라, 부채를 통해서 자산을 증식하는 주체성이 없이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대중적 동의를 획득한 새로운 주체성은 등장하지 않았다. 전지구적으로 위기가 확산되자 부채인간이라는 주체성 형태는 투자자로서 수익을 남기기보다는 1% 소유자 집단의 수익을 늘려주는 빚쟁이로 판명되었고, 심지어는 긴축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적 리스크(risk)를 전담하는 노예로 드러났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부채인간’ 자체도 인간중심적인 주체성이 아니란 점이다. 부채인간은 빚쟁이로서 사회적 규범을 따르기도 하지만, 금융상품의 리스크 계산, 간단히 말해 신용등급에 따라 자신의 행위방식이 조정되는 일종의 자동화된 기계인 셈이다. 저자가 볼 때 부채인간 이후 자본주의는 새로운 주체성을 발명하지 못했다. 문제는 비판이론과 저항운동도 새로운 주체성을 발명하지 못하고, 대중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의 공산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 급진민주주의의 안에서 인민, 시민적 주체, 혁명적 주체 등이 수행했던 역할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주체성의 발명이 필요하다
오늘날처럼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가 사회체의 지배적 모델로 작동할 때,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 인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경제가 하나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 등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고, 심지어는 다른 영역의 운영 모델이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여러 논자에 따르면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최후 판본인 ‘부채인간’이 지배적인 주체성이 될 때, 우리는 더는 인민도, 계급도, 시민도 아닐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민이나 계급이나 시민으로 정치의 장에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 삶의 리스크를 투자 포트폴리오로 분산시키는 계산적 주체이다. 이런 주체들에게 권력기구가 자기 자신을 대표한다는, 그것도 집합적으로 대표한다는 근대 정치의 상상력은 정치권력의 단순한 허구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비판이론과 실천의 고민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계론의 혁신을 통해 비기표적 기호계 주체성이라는 새로운 주체성 대안을 내놓는 이 책은, 이런 고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것이다.
랏자라또에 따르면 기존의 비판이론은 (요즘 유행하는 지젝, 버틀러, 바디우, 랑시에르에서 인지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어떤 관점이든 너무나 인간중심적이고, 의식·인지·언어 중심적이다. 인간=인지=의식=언어 중심성은 결국 인간, 인지, 언어 등이 기존의 공고화된 권력 체제를 전제하는 한 권력의 관점을 재생산한다. 예컨대 아무리 우리가 권력의 언어를 (수행적으로) 전유하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권력의 언어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현실의 운동과 저항은 이런 권력의 호명이 없어도, 혹은 공동체를 전제하지 않아도 이미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권력의 시각을 비판하기 위해서 우리는 권력이 공고화되기 이전의 상태, 그러니까 기계적인 소통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으며 이런 분석을 통해서 탈인간-기계들의 접속을 새롭게 전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런 시도는 우리가 아직까지 상상하지 못한 가능성을 개방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디스토피아, 혹은 유토피아를 문제 삼기 위해서는 자본의 비기표적 작동방식을 우리가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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