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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아이콘) 백이와 숙제 : 서사와 이미지 변용의 계보학

김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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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충절의 아이콘) 백이와 숙제 : 서사와 이미지 변용의 계보학 / 김민호 지음
개인저자김민호
발행사항서울 :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0
형태사항347 p. : 삽화, 초상 ; 24 cm
총서명知의 회랑 ;12
ISBN9791155504093
서지주기참고문헌(p. [332]-335)과 색인수록
기금정보주기이 책은 2015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주제명(개인명)백이=伯夷 SLSH
숙제=叔齊 SLSH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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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영원한 충절은 없다
동아시아 충신의 전형
백이와 숙제의 메타모르포시스

충의와 절개의 상징에서
변절자 혹은 조롱의 대상까지
동아시아 고전 속에서 입체화되는
백이와 숙제 캐릭터들의 계보학

주나라 무왕이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받들어 싣고 동쪽 은나라 주왕을 정벌하려 할 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이렇게 간한다.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장례는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다니 이를 효(孝)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된 자가 군주를 시해하려 하다니 이를 인(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이 한 장면으로 백이와 숙제는 지금까지도 충의와 절개의 상징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동아시아 문헌들이 전하는 여러 기록을 찬찬히 뒤져보면, 백이와 숙제는 때론 변절자가 되기도 했고, 때론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정권 변동기나 혁명기엔 힘 있는 자들에 의해 그 형상이 갖은 굴곡을 겪기도 했다.
이 책은 백이와 숙제의 창조된 형상이 중국의 전 시대에 걸쳐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영원한 충절은 없다
동아시아 충신의 전형
백이와 숙제의 메타모르포시스

충의와 절개의 상징에서
변절자 혹은 조롱의 대상까지
동아시아 고전 속에서 입체화되는
백이와 숙제 캐릭터들의 계보학

주나라 무왕이 아버지의 위패를 수레에 받들어 싣고 동쪽 은나라 주왕을 정벌하려 할 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 이렇게 간한다.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장례는 치르지 않고 바로 전쟁을 일으키다니 이를 효(孝)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하된 자가 군주를 시해하려 하다니 이를 인(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이 한 장면으로 백이와 숙제는 지금까지도 충의와 절개의 상징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동아시아 문헌들이 전하는 여러 기록을 찬찬히 뒤져보면, 백이와 숙제는 때론 변절자가 되기도 했고, 때론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정권 변동기나 혁명기엔 힘 있는 자들에 의해 그 형상이 갖은 굴곡을 겪기도 했다.
이 책은 백이와 숙제의 창조된 형상이 중국의 전 시대에 걸쳐 어떻게 변모해왔는지,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 국가에서는 어떤 이미지로 소비되어왔는지를 통시적으로 조감한 흥미로운 문학 저작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고정되거나 절대적인 이미지 혹은 실체는 존재할 수 없으며 다만 시대와 상황에 따라 활용ㆍ소비될 뿐이라는, 문헌학적이고 객관적인 서사와 이미지 변용의 계보학을 보여주고자 했다.
새로운 지의 총화를 모색하는 성균관대학교출판부 학술기획총서 ‘知의회랑’의 열두 번째 책이다.


저작의 단초


이 책은 사마천이 쓴 『사기』 「백이열전」에서 ‘폭군’인 주왕을 없애려 출정하는 주무왕을 막아서며 ‘충효의 도리’를 역설하던 백이와 숙제가 과연 칭송받아 마땅한 존재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일반인의 상식과 성정이라면, 폭군을 치러 간다는데 이는 막아설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무왕을 도와 그 일에 앞장서야 하는 게 옳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시다시피 백이와 숙제는 이 돌발 행위로써 『사기』 이후 긴 시간 충절의 상징이자 대명사로 인식되어 왔다. 이에 두 주인공이 고통 받는 민초보다 기득권을 지닌 군주의 사정에 더 신경 쓰는 존재로만 보였던 21세기의 저자는 「백이열전」을 읽고 나서 내내 찜찜했었다고 회상한다. 저자가 백이와 숙제의 고사들을 ‘계보학적’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를 느낀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충절의 아이콘이 탄생하기까지


저자는 곳곳에 흩어져 시차를 두고 제각각 소비되어온 백이와 숙제의 서사와 이미지들을 하나의 시선 속으로 소환해낸다. 사마천의 『사기』가 나온 진한시대를 하나의 표지로 삼아 그 앞에 선진시대의 백이ㆍ숙제 자료들을 세우고, 그 뒤로 위진과 당대ㆍ송대ㆍ명대ㆍ청대 그리고 현대 중국의 백이ㆍ숙제 자료들을 차례로 채워 통시적인 조감의 시야를 확보한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이미 클리셰(cliché)나 마찬가지인, 그러하여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백이ㆍ숙제의 ‘충절 이미지’가 『사기』 「백이열전」 이전에는 그 어떤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유가 경전인 『논어』에서는 “인을 추구하여 인을 얻은 사람들”이라고 이야기 했을 뿐, 백이와 숙제가 주무왕의 전쟁에 반대했다는 기록 자체가 없다. 또한 『맹자』에서는 폭군인 은나라 주왕을 군주가 아닌 “일개 사나이[一夫]”로 평가하고, 주무왕 역시 섬길 만한 군주가 아니라고 묘사한 대목이 여럿 나온다. 즉, 맹자는 백성의 입장에서 상황을 판단하면서 백이와 숙제를 충절의 상징으로 상정하기는커녕, 오히려 폭군을 제거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맹자는 단지 이들을 “성인 중 맑은 분[聖之淸者]”으로 평가하고 있을 뿐이다.
도가 경전인 『장자』의 경우도 “어지러운 정치를 미루어 폭정과 바꾸는 것일 뿐[以亂易暴]”이라며 주무왕의 정치를 폭정으로 평가하고, 나아가 도가적 세계관에 의거해 명분에 얽매여 있는 백이와 숙제를 함께 비판한다. 법가의 기록인 『한비자』에도 군주의 통치에 도움이 안 되는 “무익한 신하”라는 언급만 있을 뿐, 그 어디에서도 충절의 아이콘이라는 백이와 숙제의 형상은 찾아볼 수 없다.
사마천이 어떤 자료를 근거로 백이와 숙제가 주무왕의 말고삐를 잡으며 신하된 입장에서 군주를 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사기』 「백이열전」 이전 기록들에서는 ‘불사이군(不事二君)’하며 군주의 기득권을 강화시키는 백이와 숙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이들이 고죽국의 왕 자리를 서로 양보하고 청렴한 삶을 살았다는 점, 그리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굶어 죽은 상황은 『사기』 이전 대부분의 기록들에서 보인다. 이렇게 충절의 상징으로서 백이와 숙제의 이미지는 사마천이 처음 창조해낸 것이었다.


충절 프레임에 갇혀가다


『사기』 「백이열전」에서 처음 나타난 충절의 상징으로서의 백이 형상은 위진 시기에는 굳게 자리 잡지 못했다. 조조는 「의전주양봉교」란 교지(敎旨)에서 백이와 숙제에 대해 작위를 버리고 무왕을 꾸짖은 어리석은 이들이라 비판한다. 은운의 『소설』에서도 백이는 어리석은 필부라 비판받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당대의 한유가 「백이송」을 쓰면서부터 백이와 숙제의 충절 이미지는 확고해지기 시작한다. 한유는 충성과 절의의 기준으로 두 주인공을 평가하면서 이들을 “우뚝 서서 홀로 나아갔다”며 칭송한다. 이어 「백이송」 이후 거의 모든 백이 관련 기록들이 이 충절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물론 송대 개혁파 정치가 왕안석이 「백이론」을 써서 이 프레임을 깨보려 애쓰지만, 그저 약간의 파열음을 내는 데 그칠 뿐이었다. 이후 백이와 숙제는 확고하게 충절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송대 보수파 정치인 소식은 「무왕론」을 써서 주무왕의 혁명을 비판하는 한편, 백이와 숙제의 충절을 높이며 이 프레임을 더욱 공고히 한다. 성리학의 기틀을 다진 정이와 주희는 주무왕의 혁명을 막아선 백이와 숙제의 행동을 일정 정도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들 역시 같은 프레임 안에서 논의하고 있을 뿐이다. 북송의 민족 영웅인 악비를 죽음에 몰아넣고 금나라와 화친해 중국의 대표 간신에 오른 진회까지도 백이와 숙제의 충절을 드높일 정도였다.


새로운 차원

명나라 개국 황제 주원장은 「박한유백이송」에서 충절의 상징으로 백이와 숙제를 칭송한 한유를 비판한다. 개국 공신 유기도 이들을 쓸모없는 신하로 평가해버린다. 새 왕조의 탄생을 모색했던 이들에게 주무왕의 말고삐나 잡아 전쟁을 반대하는 자들이란 불필요한 존재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훗날 정권이 안정되자 다시 충신이 필요해진 주원장은 백이와 숙제를 제왕의 사당에 종사하게 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명대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백이와 숙제를 비판하거나 숭앙하는지에 상관없이 일단 이들을 충절의 상징이란 구조 안에 둔다는 것이다. 자연히 송대를 이어 명대에도 『사기』 「백이열전」에서의 전거는 강력하게 작동했다. 다만 이지(이탁오)의 경우 ‘원망’이란 키워드로써 공자와 사마천의 백이와 숙제 해석을 비교하면서 기존과는 다른 그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고 있다.
청대에 들어와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에서 비로소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가 정리된다. 그는 『명이대방록』 「원군」에서 전통 시기 군주의 개념을 근본에서부터 흔든다. 명나라 유민(遺民)인 그는 충절의 상징들을 적극 칭송하며 청을 비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군주란 원래 백성을 위해 봉사하던 존재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백성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며, 이것도 모른 채 폭군이 나와도 역성혁명을 하면 안 된다면서 불사이군이나 외치는 한유나 소식 같은 옛 지식인들은 어리석은 선비들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청초의 독특한 소설 『두붕한화』에는 「수양산숙제변절」이란 숙제가 변절한다는 자극적인 제목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숙제의 변절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그리지 않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요컨대 확고하게 자리 잡았던 백이와 숙제의 충절 이미지 자체를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는 기록들이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서사와 이미지의 변용과 활용


현대 중국의 혁명가이자 소설가인 노신(루쉰)은 『고사신편』 「채미」에서 백이와 숙제를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늙은이로 그려내고 있다. 낡고 희망 없는 중국을 바꿔보려 했던 그의 입장에서, 불사이군을 외치며 주무왕의 혁명을 막아서는 백이와 숙제는 구시대의 낡은 인물에 불과했다. 또한 모택동은 정치 상황에 맞춰 필요에 따라 이들을 바라본다. 즉, 주무왕의 혁명전쟁에 함께하지 않았다고 백이를 비판하는가 하면, 또 주무왕의 출병을 막았다고 이들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제 백이와 숙제는 언제든지 그 필요에 따라 소환ㆍ소비가 가능한 도구에 불과해져버린 것이다.
백이와 숙제는 바로 지금도 그렇게 정치ㆍ경제적 필요에 의해 활용되고 있다. 이 책 ‘현대의 장’에는 최근 이제묘가 위치한 노룡현 현지를 방문해 중국고죽문화연구중심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백이ㆍ숙제의 고사가 새로운 문화 콘텐츠와 정치적 필요로 다양하게 활용되는 상황을 목도한 저자의 기록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서사와 이미지의 확산


조선의 경우에도 백이와 숙제 관련 기록은 넘쳐흘렀다. 특히 왕조 교체기나 비정상적인 왕위 변동의 시기에 백이는 반드시 소환되었다. 고려와 조선의 교체기 태종 이방원은 백이의 행동을 처음에는 비판적으로 묘사하다가 나라 상황이 안정되어 제 왕조에 충성할 신하가 필요해지자 백이를 다시 긍정적으로 호명한다.
일반적으로 조선에서는 백이와 숙제의 충절 이미지가 더 강화되는 경향이 보인다. 단종 복위를 꾀했던 사육신과 생육신의 글에서는 고사리도 먹지 말고 죽었어야 했다고 할 정도로 충절의 프레임은 상황에 따라 극단으로 흐르기도 했다. 김창흡과 박지원처럼 충절 이미지를 깨는, 왕안석 계열의 백이 관련 기록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는 결코 조선의 주류가 아니었다. 매년 북경을 방문했던 연행사들 역시 연행 노정에 있는 이제묘를 반드시 방문해 경건하게 고사릿국을 끓여 먹으며 이들을 추모하곤 했다. 이들에게 또 다른 해석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다 18세기 중엽 박지원의 『열하일기』 속에서 유머를 활용해 백이와 숙제의 경건함을 희화하며 비로소 이들의 충절 이미지를 부수는 기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나아가 백이와 숙제의 고사는 베트남과 일본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두 나라에서 백이ㆍ숙제 형상의 변용 양상도 한중과 유사하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백이와 숙제의 형상은 전통 시기 한자 문화권에서 충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굳게 자리 잡았고, 또한 이는 불사이군하는 기득권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는 데 충실히 작용했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가 등장한 것은 『사기』 「백이열전」 이후로, 그 이전의 문헌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애당초 동아시아권에서 백이와 숙제의 이미지는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과 필요에 따라 변용되며 흥미로운 입체적 형상으로 거듭났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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