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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문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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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 문영숙 지음
개인저자문영숙, 1953-
발행사항부천 : 우리나비, 2020
형태사항252 p. : 삽화(일부천연색), 초상 ; 23 cm
ISBN9791186843550
기금정보주기본서는 경기도 경기문화재단의 문예진흥지원금을 보조받아 발간되었음
주제명(개인명)최재형=崔在亨, 1860-1920 SLSH
분류기호951.902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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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신분을 뛰어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시베리아 한인들의 영원한 페치카
러시아 항일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일대기

<<2020년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의 해>>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독립 운동 역사는 최재형을 빼놓고서는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최재형은 러시아 독립운동 활동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민 중 그를 독립운동가로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무척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는 대한민국이나 중국에 비해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사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음에 기인할 것이다. 또한 북한과 대치한 상태로 체제 경쟁을 하던 시기에는 러시아 국적의 최재형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사회 분위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해주에 거주하던 최재형과 한인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을 벌였다. 가난한 노비로 태어나 모국인 조선으로부터 받은 것 하나 없었음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최재형 선생. ‘우리나비’는 신간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신분을 뛰어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시베리아 한인들의 영원한 페치카
러시아 항일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 일대기

<<2020년 최재형 선생 순국 100주년의 해>>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독립 운동 역사는 최재형을 빼놓고서는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최재형은 러시아 독립운동 활동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민 중 그를 독립운동가로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무척 드문 것이 현실이다. 이는 대한민국이나 중국에 비해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사 연구가 활발하지 못했음에 기인할 것이다. 또한 북한과 대치한 상태로 체제 경쟁을 하던 시기에는 러시아 국적의 최재형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사회 분위기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연해주에 거주하던 최재형과 한인들은 사회주의, 공산주의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을 벌였다. 가난한 노비로 태어나 모국인 조선으로부터 받은 것 하나 없었음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최재형 선생. ‘우리나비’는 신간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 김원봉, 김구, 안창호 외에도 기업가, 교육가, 독립운동가, 언론가로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한 위대한 민족 지도자 최재형을 재조명하고 널리 알리는 길에 일조하고자 한다.

최재형은 1860년 8월 15일, 함경북도 경원(慶源)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이름은 최 표트르 세메노비츠(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이며, 이명은 최재형(崔在衡), 최도헌(崔都憲), 별명은 최페트까, 최비지캐로 불렸다. 최재형의 부친은 가난한 소작인이었고 모친은 재색을 겸비한 기생이었다. 최재형의 가족은 1869년 고국을 떠나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인 지신허(地新墟)에 정착했다. 지신허로 이주한 지 2년 후, 11살의 어린 최재형은 형수의 차별과 구박을 피해 가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굶주림과 피로로 탈진한 최재형은 포시에트 해변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마는데, 이때 러시아 상선 선원들이 그를 구조하게 된다. 상선의 선장과 부인은 최재형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특히 선장 부인은 최재형에게 러시아어, 러시아 고전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을 가르쳐 주었고 학교에 다니지 못한 최재형에게 깊은 소양과 폭넓은 안목을 갖게 해 주었다. 선원 생활을 하는 동안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트르부르크까지 두 번을 왕복하면서 여러 나라의 선진 문물들을 접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을 얻게 된다.

최재형은 3년간의 상사 생활을 마치고 10년 만에 다시 가족들을 찾았다. 가족들은 이미 지신허 마을을 떠나 인근의 얀치헤(煙秋)로 이주해 있었다. 그곳에서 최재형은 러시아 정부의 군용 도로 건설 작업에 참여하게 되는데, 당시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한인이었던 최재형은 통역사를 맡아 한인 3백명을 데리고 노우키예프스크-바라바시 구간의 도로를 개축하게 된다. 이때 최재형은 러시아 관리들과 한인들 간에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특히 러시아어를 몰라 불평불만을 해소할 수 없었던 한인들의 입과 귀가 되어 주었다. 이로 인해 한인 사회에서 최재형은 ‘최비지깨’라는 별명으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으며, 러시아 정부로부터는 돈독한 신뢰를 기반으로 은급훈장을 수여받았다.

1893년, 최재형은 러시아 최초로 군수에 해당하는 도헌(都憲)에 선출되어 한인 사회에서의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는 등 러시아 정부로부터 두터운 신뢰도 얻고 있었다. 연추 도헌으로서 최재형은 한인 교육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한인 마을에 세워진 대표적인 러시아식 한인 학교인 연추 니콜라예프스코예 소학교에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 2천 루블을 후원하였으며, 우신학교(又新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으로서 학교를 운영했다. 또한 연해주 지역 한인 마을에 32개 소학교를 세우는 데 큰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교육 사업을 가능케 했던 것은 최재형이 유능한 사업가이자 재력가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재형은 러일전쟁 특수로 러시아 군대에 소고기 및 건축 자재 납품 사업과 임대 사업을 통해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최재형은 떠나온 조국이 러일전쟁의 전장이 되어 주권이 유린되는 현실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전쟁이 끝나자 그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일본의 한반도 정책을 직접 파악하기 시작했다. 6개월 만에 다시 연추로 돌아온 최재형은 곧바로 항일투쟁을 위한 의병 조직에 나섰다.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 이범윤(李範允)과 노우키예프스크에 의병 본부를 설치하고 자금 모금과 의병 모집을 목적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安重根), 엄인섭(嚴仁燮) 등의 동지들도 최재형의 의병 본부에 합류했으며,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던 이위종(李偉鍾)도 부친인 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의 명령을 받고 노우키예프스크로 왔다. 1908년 4월 최재형은 이들과 함께 항일 조직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총장에 선임되었으며, 해외에서 우리말로 발행된 최초의 일간지인 《해조신문》에는 ‘동의회 취지서’가 발표됐다. 최재형은 동의회의 군자금으로 거금 1만3천 루블을 쾌척하였으며, 이위종이 1만 루블을, 수청(水淸) 지방에서 6천 루블이 모금되었고, 각지로부터 군 총 100정이 수집되었다. 동의회 소속 의병 부대는 1908년 7월초부터 9월에 걸쳐 국내 홍범도 부대 등과 연합 작전을 펼치며 함경도 국경 지대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안중근이 영산전투에서 패하고 수적 열세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 앞에 퇴조할 수밖에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최재형도 의병 운동과 거리를 두며 온건 투쟁 노선을 취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했다. 이는 일본과의 관계 변화에 따른 러시아의 정책 변화, 이범윤과의 갈등, 최봉준 같은 의병 운동 비판자들과의 불화 등 복잡한 이해관계들에 기인한다. 그러나 영산전투 대패 후 최재형은 1909년 1월, 재정난으로 폐간되었던 《大東共報(대동공보)》의 사장이 되어 격렬한 논조로 일제를 비판하고 한인들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노우키예프스크에 있는 최재형의 집에는 애국지사들이 자주 체류했는데, 안중근 역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러 떠나기 전 그의 집에 머물며 사격 연습을 하였다. 1910년 12월 최재형은 이종호와 함께 연추에 ‘국민회’를 설립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자신의 집을 본부 사무실로 제공하였다. 비밀리에 조직된 국민회의 목적은 학교 설립, 교육 장려, 인재 등용, 국권 회복 등이었다. 1910년 한일합병을 단행한 일제는 러시아 당국으로 하여금 이범윤 등 7명을 이르쿠츠크로 추방하도록 하였으며, 1911년 초에는 최재형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최재형이 일제의 첩자라는 날조된 문서에 근거하여 최재형을 연추 도헌에서 해고하고 군관구 밖으로 추방할 것을 연해주 군정순무사에게 건의한 것이다. 그러나 우수리스크 철도관리국 헌병경찰대장인 쉬체르코바는 연해주 군정순무사 스베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제의 간계를 폭로하고 최재형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러시아의 충성스러운 애국자라고 주장했다. 포시에트 구역 경찰서장 역시 최재형은 러시아 관리들과 모든 주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라고 옹호했다. 그리하여 최재형은 조사만 받고 석방되어 추방은 면했지만, 도헌직에서는 물러나야 했다. 조선의 병탄 이후 《대동공보》가 폐간된 후에도 한인들은 후속 신문의 발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대양보》 발간이 결정되자 최재형이 사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종호와 함께 신문 발간 비용을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대양보》는 인쇄기 분실로 지속적으로 발간되지 못하였다.

1911년 최재형은 한인의 실업과 교육을 장려할 목적으로 ‘권업회’를 발기하였다. 1911년 12월, 러시아 당국의 공식 인가를 받고 개최된 권업회 공식 창립대회에서 최재형은 김학만, 이범윤과 함께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후 최재형은 1913년 10월에 개최된 권업회 특별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되면서 파쟁으로 인해 오랜 침체기에 있던 권업회를 재건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최재형은 1913년 말, 최봉준 등 지도자들과 함께 ‘한인 아령이주 50주년 기념 발기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한인 사회를 적극적으로 이끌고자 노력하였다.

러시아 혁명 후에도 최재형은 꾸준하게 진보적인 사회 활동을 활발하게 계속했다. 그러나 10월 혁명 후인 1918년 여름, 체코군의 봉기를 계기로 일본군이 무력 개입하였고 최재형의 집이 있던 슬라비얀카에도 일본군이 상륙하게 되자 최재형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918년 6월, 러시아 연해주의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에서는 제2회 특별 ‘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러시아 각지로부터 온 지역 및 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였는데 참석자 전원의 만장일치로 최재형이 이동휘와 함께 명예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러시아의 한인들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당시 한인 사회의 양대 축이었던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 두 지역의 한인들이 각각 파견 대표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최재형은 양측에서 각각 선정한 예비 후보에 포함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최종 대표는 윤해(尹海)와 고창일(高昌一)로 결정되었는데, 이는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최재형과 같이 이름이 알려진 거물급 인사를 배제하고자 했음에 기인한다. 최재형은 러시아 한인들의 중앙 기구였던 전로한족중앙총회가 3?1운동을 전후하여 발전적으로 확대 개편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외교부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최재형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설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총장으로 선임되기도 했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1920년 4월, 일본군은 러시아 혁명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스파스크 등지의 러시아 혁명 세력과 한인들에 대해 불의의 습격을 가했다. ‘4월 참변’이라 일컫는 일본군의 극악무도한 만행으로 1천여 명의 러시아 혁명군과 빨치산 부대 대원들, 그리고 일반인들이 살해되고 고문을 당했다. 최재형의 부인과 딸들은 일본군의 보복을 걱정하며 최재형에게 빨치산 부대로 도피하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내가 숨는다면 일본인들이 잔인하게 너희들에게 복수할 것이다.”라며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다음날 아침 최재형은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엄주필(嚴柱弼) 등 3명의 인사들과 함께 왕바실재 언덕에서 재판 없이 만행적으로 총살되었다. 이렇게 아령(俄領) 한인 사회를 개척하고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 러시아인 및 한인들로부터 추앙받았던 최재형은 국권을 상실한 조국을 위해 투쟁하다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최재형 선생은 1962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을 받았다. 최재형 선생이 순국한 지 100주기가 되는 올해(2020), 문영숙 작가가 지난 2017년 《국방일보》에 1년간 연재했던 글을 다듬어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엮었다. 역사의 사각지대에 묻혀 조명되지 못했던 러시아에서 활동한 항일투사들이 이제라도 제대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항일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애국지사 최재형 선생의 위대한 삶의 자취가 독자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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