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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여행

전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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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여행/ 전호태 글
개인저자 전호태= 全虎兌, 1959-
발행사항서울: 푸른역사, 2012
형태사항234 p.: 일부천연색삽화; 21 cm
총서명한국역사연구회 역사책장;2
ISBN 9788994079769
9788994079745(세트)
서지주기 색인수록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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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의 삶을 읽다

고분벽화, 고대 사회의 이면을 말해주는 역사적 통로

그림은 만국 공통·시대 공통의 언어다.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그림만큼 좋은 것이 없다. 왜? 그림이 훨씬 쉬우니까. 인터넷 사회의 비약적인 발전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디자인된 그림을 매개수단으로 삼았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고대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고대 사회에서 의사소통은 상당기간 문자가 아닌 그림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쐐기문자가 출현하기까지는 천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데모틱demotic이라 불리는 ‘기호’에 가까운 문자가 되기까지 소요된 시간도 2천 5백 년 가량이었다.
요컨대 고대 사회가 남긴 그림은 해당 사회를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요소다. 그림은 문자 이상으로 많은 이면의 이야기를 제공해준다. 고분벽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고분벽화는 고대 사회의 다른 여러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오래전 펼쳐졌던 삶의 온갖 모습과 생각을 현재와 이어주는 귀중한 역사적 통로이자 증언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인의 삶을 담은...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의 삶을 읽다

고분벽화, 고대 사회의 이면을 말해주는 역사적 통로

그림은 만국 공통·시대 공통의 언어다.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그림만큼 좋은 것이 없다. 왜? 그림이 훨씬 쉬우니까. 인터넷 사회의 비약적인 발전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디자인된 그림을 매개수단으로 삼았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고대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고대 사회에서 의사소통은 상당기간 문자가 아닌 그림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쐐기문자가 출현하기까지는 천 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데모틱demotic이라 불리는 ‘기호’에 가까운 문자가 되기까지 소요된 시간도 2천 5백 년 가량이었다.
요컨대 고대 사회가 남긴 그림은 해당 사회를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요소다. 그림은 문자 이상으로 많은 이면의 이야기를 제공해준다. 고분벽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고분벽화는 고대 사회의 다른 여러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오래전 펼쳐졌던 삶의 온갖 모습과 생각을 현재와 이어주는 귀중한 역사적 통로이자 증언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인의 삶을 담은 그릇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에게 고분벽화는 역사 속 한 시대를 나타내는 전시 포스터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여러 종류의 책 표지, 특정 기관이나 단체의 광고지 디자인 재료 정도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라. 강서대묘의 주작은 철학연구서의 표지를 장식한다. 무용총의 사냥 장면은 궁술 관련 단체의 광고지에 등장한다. 무용총의 수박희手搏戱 장면이나 무용 장면은 한국고대사 분야의 저서에 시대 분위기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쓰인다. 이처럼 오랜 기간 고분벽화는 상징적 기호 정도의 쓰임새를 넘어서지 못했다. 고분벽화가 벽화 이면에 감춰진 역사적 사실 혹은 정황을 파악하기 위한 원재료로 사용되는 일은 매우 드물었던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 전호태 교수는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책장〉 두 번째 책인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여행》을 통해 이러한 현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읽는 통로를 펼쳐 보인다. 한국 문화의 원형을 담고 있는 가장 귀중한 문화유산인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자리 찾기를 위해 고구려 고분벽화가 고구려 역사, 문화의 흐름과 그대로 닿아 있는 역사문화 자료이자 고구려인의 종교관과 신앙세계를 담은 보고임을 가능한 한 알기 쉽게 설명한다. 고구려 벽화고분이 고구려의 역사적 경험이나 한국 고대 문화의 빼어난 수준을 담아낸 작품이라는 사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짚어냄으로써 독자 여러분을 고분벽화를 읽는 통로로 안내한다. 그 길을 따라가 보자.

고구려 고분벽화를 읽는 길

고분벽화, 고구려로 오다

고분벽화는 말 그대로 무덤 안 공간의 벽과 천장을 캔버스 삼아 그린 그림을 말한다. 벽과 천장이 나무판자로 마감되었을 수도 있고 벽돌이나 돌로 마무리되었을 수도 있지만 면을 여러 가지 방식을 동원하여 잘 다듬기만 하면 그림을 그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언제부터, 어떻게 이 고분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을까?
기원전 1세기 중엽, 압록강 중류와 혼강渾江 일대 예맥 사람들의 나라들 몇이 모여 소국 수준을 벗어난 큰 나라 고구려의 건국을 선언했다. 예맥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모여 만든 고구려 사람들은 오랜 기간 시신을 넣은 관을 강돌로 덮어 마무리하는 돌무지무덤을 고유의 무덤 양식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국의 한漢 문화와의 접촉 이후 한인들의 돌방무덤 양식을 받아들인다. 돌방무덤은 강돌이나 판돌로 벽과 천장을 만들어 그 공간 안에 관을 넣고 돌방 바깥은 흙으로 덮는 방식이었다.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의 변화는 새롭게 생겨난 무덤 내부의 공간, 즉 돌방을 장식하는 문화까지 만들어냈다. 공간을 채우거나 공간을 이루는 면, 즉 돌방의 벽과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하는 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중국 한인들은 장식에 능했고, 관념을 형상화하기를 좋아했다. 산 자들의 집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의 거처에도 온갖 장식을 남겨두었다. 한인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고구려 사람들은 한인들의 이 같은 문화, 구체적으로 죽은 뒤의 세계나 죽은 자들의 새 삶터를 형용한 그림과 온갖 장식물들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벽화미술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국에서 고구려로 수용되었다.

고구려, 독자적인 고분벽화를 남기다
현재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는 3세기 중엽부터 7세기 전반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 이 가운데 3세기 중엽부터 5세기 초까지 제작된 고분벽화는 초기 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
초기 고분벽화의 공통주제는 생활풍속이다. 무덤 주인 부부의 일상생활 모습, 무덤 주인 생전의 기억할 만한 사건이나 무덤 주인의 신분 및 지위를 나타내는 장면이 대부분이었다. 생활풍속이 주제인 고분벽화에 의식주를 포함한 생활 현장의 이모저모가 그려지고 무덤 주인의 삶에서 기억될 만한 장면이 함께 묘사되는 것은 생전의 삶을 지하세계에 재현하면서 내세의 삶을 기약한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이의 생전 생활상이 그대로 다시 그려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벽화에 죽은 이와 그의 자손이 바라는 현재와 내세 삶의 모습이 상당 부분 겹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장의미술에서 공통적으로 전제되는 것이 ‘기원, 소망’이고 ‘주술적 효과’라는 점에서 보면 일견 자연스러운 일이다.
5세기 중엽부터 5세기 말에 걸쳐 제작된 중기 고분벽화는 초기에 비해 주제가 다양하다. 생활상을 재현한 것 외에 상징성이 높은 장식무늬를 주제로 한 것, 천문신앙을 바탕으로 성립한 사신四神을 주제로 삼은 것이 모두 발견된다. 또한 중기 고분벽화는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주도하던 동북아시아의 패권국 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 모습을 담고 있다. 연꽃무늬 고분벽화는 고구려 사람들 사이에 불교적 내세관이 크게 유행했음을 보여주며, 낯선 서역인의 얼굴과 팔다리에 뱀이 감긴 우주역사의 모습은 당시 고구려가 활발한 대외 교류를 행했음을 알려준다.
6세기 초부터 7세기 전반은 후기 고분벽화가 제작되는 시기다. 후기 고분벽화의 주제는 사신이다. 이 시기에는 장식무늬나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벽화가 제작되지 않는다. 후기 고분벽화가 제작되던 시기의 고구려는 정치가 불안정하고 대외관계에서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귀족세력 간 권력투쟁, 기존 불교세력과 신흥 도교세력 간 갈등으로 정치사회적 안정이 깨지면서 문화적 역동성도 약화된 것이다. 중국 남북조에서 유행하던 미술양식이 그대로 옮겨진 것처럼 보이는 고분이 여럿 확인되는 점도 이 같은 당시 고구려의 혼란을 말해준다. 그러나 후기 고분벽화 시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강서대묘나 강서중묘는 고구려 문화의 저력을 재삼 확인시켜주는 좋은 사례다.

고구려 고분벽화, 지키고 보존해야 할 우리의 문화유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그러나 웃을 수만은 없다

2004년 7월,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벽화고분과 일부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고구려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됨으로써 한국 고대사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가 세계적 수준의 문화유산을 남겼음이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고구려 벽화고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활동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깊이 빠져든 일본의 한 노老화가가 중심이 된 민간단체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단체의 지속적인 노력이 주위의 호응을 얻으면서 추진운동이 탄력을 받게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90년대 초부터 ‘고구려 열기’에 빠져든 국내에서는 몇몇 연구자들이 고구려 벽화 고분 보존과 관련한 학술적 소견을 표명했을 뿐, 정작 이에 호응하면서 국민적 관심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려는 단체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보존을 위해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분이라는 특수한 건축물의 일부이자 1300년에서 17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회화 작품이다. 따라서 보존과 관리가 대단히 어렵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고구려 고분이 위치해 있는 중국과 북한에게는 최소한의 정보 공유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해방 후 중국과 북한에서 이루어진 고구려 벽화고분 발굴 조사는 발굴 과정과 내용에 대한 자료의 일부만 외부로 공개되었다. 어떠한 보존 조치를 취했는지, 벽화 상태의 변화가 정기적으로 점검되고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기 어렵다. 대다수 고분벽화의 현재 보존 상태 역시 외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우리에게 고구려 고분벽화는 책 표지 재료, 포스터 재료, 광고 재료로만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북한과 중국 내 고구려 벽화고분 보존 관리 방안을 꾀하고 인력과 기술과 비용을 투입할 의지를 먼저 표명해야 한다. 우리부터 고구려 고분벽화가 세계적 문화자산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안팎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모색’을 진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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