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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종교 논쟁

Bentley, R. Alexa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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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현대 과학·종교 논쟁/ 앨릭스 벤틀리 엮음 ; 오수원 옮김
개인저자Bentley, R. Alexander, 1970-, ed.
오수원, 역
발행사항파주: 알마, 2012
형태사항349 p.: 삽화; 23 cm
원서명(The) Edge of reason?
기타표제이성의 칼날로 오래된 논쟁의 21세기 급류를 헤쳐나가다
ISBN9788994963402
일반주기 본서는 "The edge of reason? : science and religion in modern society. c2008."의 번역서임
서지주기참고문헌(p. 17)과 색인수록
일반주제명Religion and science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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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과학 지식과 종교 신앙은 모순 관계인가?
최근 몇 년 동안 종교 논쟁을 규정해온 것은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이다. ‘우리’ 대 ‘그들’ 간의 이러한 분열은 사회에 어떤 의미를 띠는가? 이 주요 쟁점과 직접 관련을 맺고 있는 사회과학자와 자연과학자, 신학자, 인류학자 들이 입장을 표명하며, 이 현대적 논쟁에 각자 그들의 생각을 밝혔다.

엮은이 앨릭스 벤틀리(영국 더럼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사회와 종교에 대해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종교의 세계는 수많은 사회와 수천 년(아마도 수십만 년)의 세월을 관통하므로 현대적인 경험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또한 철학과 과학의 역사에서 신의 존재라는 쟁점은 논리적으로 해결되었던 적이 없다. 존 헤들리 브룩이 말했듯,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다윈, 카뮈, 칼뱅, 아인슈타인, 니체, 파스칼을 비롯한 철학자와 과학자에 이르기까지 이를 해결하려 했던 모든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단 한번도 해결을 본 적이 없다.
이 책은 사회의 문화적 진화와 과학과 종교의 믿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회 간에 존재하는 ...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과학 지식과 종교 신앙은 모순 관계인가?
최근 몇 년 동안 종교 논쟁을 규정해온 것은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이다. ‘우리’ 대 ‘그들’ 간의 이러한 분열은 사회에 어떤 의미를 띠는가? 이 주요 쟁점과 직접 관련을 맺고 있는 사회과학자와 자연과학자, 신학자, 인류학자 들이 입장을 표명하며, 이 현대적 논쟁에 각자 그들의 생각을 밝혔다.

엮은이 앨릭스 벤틀리(영국 더럼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사회와 종교에 대해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종교의 세계는 수많은 사회와 수천 년(아마도 수십만 년)의 세월을 관통하므로 현대적인 경험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또한 철학과 과학의 역사에서 신의 존재라는 쟁점은 논리적으로 해결되었던 적이 없다. 존 헤들리 브룩이 말했듯,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다윈, 카뮈, 칼뱅, 아인슈타인, 니체, 파스칼을 비롯한 철학자와 과학자에 이르기까지 이를 해결하려 했던 모든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단 한번도 해결을 본 적이 없다.
이 책은 사회의 문화적 진화와 과학과 종교의 믿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회 간에 존재하는 어마어마할 정도로 다양한 믿음 체계에 대한 지식(인류학), 지난 수천 년 동안의 종교에 대한 지식(고고학), 자연과 세계의 기원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한 지식(자연과학, 철학, 신학) 그리고 신앙인인 과학자의 개인적 의견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주장이 내놓는 사례의 일부로 형이상학적 질문을 이용한다.

메리 미드글리(뉴캐슬대학 철학과 교수)
과학은 사실을 다루는 반면 종교는 의미를 다루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기능하므로 충돌할 필요가 없다. 종교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종교는 어떤 형태든 모든 인류에게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과학과 종교 간의 전쟁은 이례적일 만큼 개인주의적인 서구 세계관과 공동체 중심적이며 물질주의에 덜 물든 다른 시대와 타 문화권의 세계관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로 보는 편이 적합하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과학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이며 종교 없는 과학은 맹인이다.” 인간의 삶은 매우 복잡해서 온갖 종류의 접근과 도구가 필요하며, 그런 점에서 인간의 삶은 그 전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데니스 R. 알렉산더(케임브리지 패러데이과학종교연구소 석학회원이자 소장, 바브라함연구소 수석 과학자)
다윈의 진화론은 상당히 변화하면서도 150년간 생존해온 거대 이론이라는 점에서 유례가 없다. 성공을 거두는 과학 이론의 한 가지 문제점은 그 성공 때문에 이론이 남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학 이론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 이론의 명성이 이용된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런 면에서 특히 호된 진통을 겪었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된 이후 진화론은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인종차별주의, 무신론과 같은 많은 ‘주의’를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었다. 심지어 일부는 서로 양립할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조지 버나드 쇼가 말했던 것처럼, 다윈은 “운수 좋게도 연마할 무기가 있는 모든 이들을 만족시켰다.”
‘신진 무신론자들’이 과학을 근거로 한 일련의 확고한 종교 비판 관련 저서들을 출간한 것은 미국 사회에서 종교가 장악하고 있는 지배력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진화론에 무신론의 의제를 덧입히려는 리처드 도킨스나 그 밖의 저자들의 시도는 과학의 판단 범위를 넘어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과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변형된 전형적인 예다. 사실상 도킨스는 19세기 말 당시 신흥 계급이었던 전문 과학자들에게 기성 교회의 권력과 명성을 가져다주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진화론을 이용했던 ‘다윈의 불독’인 토머스 헨리 헉슬리의 전례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매체는 창조론과 지적설계론과 도킨스에 엄청난 지면을 할애하지만, 반면 자신들의 이론에 과학 외적 부담은 어떤 것이든 지우지 말고 그 이론이 과학적으로 작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학자에 대해서는 싣지 않는다.
‘신진 무신론자’들이 선호하는 극도로 단순화된 표어는 선동이라는 목적과 정치적 캠페인에는 유용하지만, 논제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철학자, 과학자, 과학사가들은 ‘갈등 모델’을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더욱 복잡한 대안 모델로 대체했다. 거대한 학문 문헌 중에서도 스웨덴의 철학자 미카엘 스텐마크는 서로 다른 뉘앙스를 띤 수십 개의 모델을 조사했다. 역사적 측면이건 현대적 측면이건, 어떤 한 모델로 복잡한 관계를 정확히 나타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단일한 종교’ 혹은 ‘단일한 과학’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종교와 과학이 있을 뿐이며, 물론 이들은 역사 시대마다 서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과학 교육은 과학 외부의 끝없는 질문이 아니라 과학과 관련된 질문만을 다루어야 한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면역학을 강의할 때, 에이즈와 관련된 아프리카의 정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아무리 중요한 문제라 해도 정치는 분자면역학 강의에 적합한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국제보건과학 강의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마찬가지로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도 과학 수업의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창조론과 지적설계론은 과학 이론이 아니며, 현대 생물학을 다루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마크 헐서더(테네시대학 종교학, 미국학 연구 부교수)
무신론자들은 종교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일까? 신에 대한 불합리한 개념적 명제들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말은 진실일까? 종교에 대한 실효성 있는 정의에 근거한 분석, 초점이 확실한 분석이 분명 필요하다. 일부 불분명한 접근은 초점 없이 지나치게 광범위해서 결국 종교는 연구자가 바라는 의미를 띄게 되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특정한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로버트 레이턴(더럼대학의 인류학 교수)
도킨스의 주장에 따르면, 문화적 특질이나 밈은 단지 자신의 번식에만 관여한다. 밈의 적합성은 번식에 성공했느냐의 여부로 측정된다. 다시 말해, 밈은 자신을 가지고 있는 개체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흡연과 마약 남용과 창조론에 대한 믿음은 널리 확산된 부적응 밈이다. 반면 도킨스와 반대되는 입장에서 문화의 진화에 대해 다루는 이론이 있다.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 모델’이 여기에 포함된다. 공진화 모델에 따르면, 수만 년에 걸쳐서 인간은 문화를 습득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문화의 습득이 ‘적응’과 ‘장수’, 이 개념을 전수할 후손의 생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공진화 모델은 적응에 실패한 관습은 그 관습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테고, 결국 선택에 의해 제거될 것이라 가정한다.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에 따르면, “문화는 자연과 함께 돌아가는 도박과 같은 것이다.”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문화는 없지만, 밈이 일반적으로 자신을 가진 자들에게 적응하지 못한다면 자연선택은 인간이 문화에 저항하도록 하는 경향을 띠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론자의 믿음은 적응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두 가지 요점을 제기한다. 첫째, 유전자와 밈은 특정한 환경에서만 적응한다. 둘째, 인간은 고도로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인간은 물리적 환경만이 아니라 타인과 사회적 자원에도 적응해야만 한다. 결국 타인이 없다면 언어 능력이나 친화력을 진화시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창조론을 부적응의 결과이자 경험적으로 잘못된 ‘밈’이라고 폄하하는 도킨스의 주장은 창조론의 사회적 기능을 간과한 것이다. 내가 원주민의 믿음을 존중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정당화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생존과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창조론자들을 충분히 설득하거나 모욕하면 믿음을 바꿀 것이라고 도킨스는 순진하게 확신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확신은 아무리 그 믿음이 잘못된 것이고 유감스럽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윤리와 이들이 엘리트 정치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바로 그 믿음이 뒷받침해준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처사다.

사이먼 콜먼(서섹스대학 인류학 교수, 왕립인류학연구소저널 편집위원)
인류학자는 자연과학자인가, 아니면 사회과학자인가? 아니면 둘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인가? 지칠 때까지 ‘믿음’의 의미에 대해 논할 수는 있다. 그러나 ‘논쟁’이라는 단어 뒤에 있는 가정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다른 논쟁 혹은 문화 뒤에 있는 규칙과 의미는 무엇일까? 과학 대 인류학에 대해 말하기 전에 사회과학자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더욱 확신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확신을 위해 우리는 특정한 종류의 논쟁을 피하고 다른 종류의 논쟁을 장려해야 한다.
진화론에 대한 지난 논쟁들을 살펴보면, 논쟁 혹은 고민 가득한 논쟁 회피가 늘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다윈은 아내와 교회를 자극할까 두려워 출판을 피했다.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가진 토머스 헨리 헉슬리는 1860년 옥스퍼드에서 자신에게 지적으로 도전했던 윌버포스 주교를 모욕했다고 전해진다. 고디 슬랙이 언급했던 스코프스 재판The Scopes trial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반동적인 복음주의 신도를 모욕하는 계몽 변호사에 관한 것이었다. 앨리스터 맥그래스와 같은 신학자들도 과학과 종교 간의 ‘전쟁’을 언급한다. 또한 19세기 미국의 조지아 주나 영국의 게이츠헤드의 교육위원회의 기록들은 이와 비슷한 사례로 가득하다. 지난 40여 년간 미국과 타 지역의 복음주의파 신도들이 소위 세속적 인본주의에 지적, 정치적 공간을 공식적으로 다시 요구하면서, 종교와 과학 간 전쟁 모델은 새로운 힘을 얻게 되었다.
오늘날 ‘창조론’에 대한 인류학뿐만 아니라 ‘도킨스주의’에 대한 인류학도, 특정한 수사학적 형식을 지닌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문화 현상이 띠고 있는 수사학적 형식은 과학을 침해하므로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또 다른 담론에 대해서는 논쟁할 필요성을 함축한다. 인류학자가 해야 할 일은 소위 지식의 정치경제학에 작동하는 정치를 밝히는 것이다.
인류학자는 단순한 주장만으로 창조론자들과 맞설 수 없다. 교실에서 서로 대치하는 것은 합의하기 쉬운 지점이 아니다. 그러나 인류학을 실천하는 것과 인류학의 메시지를 퍼뜨리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타인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연구하는 문화기술학은 인류학자가 선택한 학문의 세계를 설명하고 공표하는 것과 다르다. 사회인류학자들의 공적 역할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특정 종교나 문화 체계를 공격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인류학자는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칠 대화나 논쟁이라는 생각의 틀을 만들기 전에, 가능한 한 타인의 세계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해야 한다. 이것이 인류학자가 해야 할 공적 임무다.

마이클 셔머(회의론학회의 창립자.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유명 회의론자 과학 강연 시리즈’ 개설, 클레어몬트대학원 경제학 겸임교수)
다윈은 “기독교와 유신론을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는 것은 주장의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대중에게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상의 자유는 인간의 정신을 점진적으로 계몽할 때 가장 크게 진보하며, 인간 정신의 ‘진보’는 과학의 진보를 뒤따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종교에 대해 글 쓰는 것을 피했고 과학에만 논의를 한정시켰습니다”라고 했다.
무엇인가에 반대하는 운동은 애초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믿지 않는 것만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없다. 위대한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이자 고전적 자유주의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1956년 반공주의를 신봉하는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뭔가를 반대하는 운동은 부정적인 태도만 드러내므로 내용과 상관없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그런 운동이 퍼붓는 열광적인 비방은 오히려 비방 대상을 선전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반대해야 할 악이 아무리 지독하다 해도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 싸우지 말고 성취하고 싶은 무언가를 위해 싸워야 한다.”
가급적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과학의 경이로움, 이성의 힘, 합리성의 미덕으로 고양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자신의 사상만이 아니라 행동에도 과학과 이성과 합리성을 적용시켜야 한다. 종교에 대해 분노를 퍼붓거나, 적대적이고 저급하거나 경시하거나 짐짓 생색내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합리적인 행동이 아니다. 이런 행동을 할 경우 신자들 또한 그에 대한 대응으로 과학과 합리성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거나, 적대적이고 저급하거나 얕잡아보거나 생색내는 태도를 반드시 취하게 된다. 다시 말해, 부정적 행동은 반대자에게 원하는 태도와는 정반대되는 불합리한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허버트 마쉬너(아이다호주립대학 인류학 연구교수, 응용분광학 연구소 소장)?캐서린 L. 리디 마쉬너(아이다호주립대학 인류학 교수)
현대 세계를 생각하면 종교와 전쟁 간에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깊고 음험한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궁금해진다. 종교를 겨냥한 비난의 주제는 지난 3,000년 동안 수억 명의 사람들이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 신의 이름으로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며, 종교 간 갈등은 오늘날에도 중동과 북아프리카, 인도, 말레이시아, 북아일랜드, 미국 전역의 고립된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주요 종교의 세속적 성공에는 군사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기원전 1000년 초 다윗 왕의 예루살렘 탈환과 방어에서 기원후 8세기 이슬람교도의 지중해 연안 확장, 이슬람교도에게 맞섰던 기원후 12세기 초의 십자군, 식민지 시대의 원주민 부족에 대한 강압적 개종, 20세기 초 유대교를 말살하려 했던 기독교 파시스트들의 만행, 그리고 현대적 근본주의의 부상까지 말이다. 그렇다. 전쟁과 종교는 길고 추악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가 그 자체로 정말 전쟁의 원인일까, 아니면 인간이 다른 문제 해결에 사용하는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와 ‘그들’ 간의 인위적 차이를 만들려는 또 다른 구실에 불과한 것일까?
그런 점에서 폭력과 종교가 언제나 나란히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논의를 끝내는 것이 편리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더 먼 과거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종교가 창조되기 오래전, 심지어 종교를 가능하게 하는 인지 능력이 발생하기 전에도 폭력은 존재했다. 공통의 목적을 가진 남성이 집단을 조직하고 다른 인간들을 맹렬히 추격하여 죽이는 인류의 능력은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종교적 이상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 종교나 언어, 정식 무기가 생겨나기 전에 350만 년 된 현생 인류의 조상인 소규모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집단은 이미 자신이 사는 경계 지역을 정찰했고, 장악한 영토를 유지했으며, 배우자를 놓고 경쟁자를 죽였던 듯하다
종교는 인간이 내집단과 외집단, 우리와 그들을 분류하는 근본적 수단이다. 종교는 유전적, 문화적, 인종적, 민족적 경계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미디어에 대한 접근으로 점점 더 세계화되는 경계 없는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불가피한 수단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가 전쟁을 초래하는가? 종교는 전쟁을 초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가 궁극적으로 전쟁을 촉진시켰던 것만은 분명하다. 종교로 인해 서로 상관없는 인간 집단은 공통의 명분을 찾게 되었고, 인류 진화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수준으로 조직을 구성하고 협동하며 살상을 자행했던 것이다. 500만 년 전 침팬지와 인간의 공통 조상들은 협동 관계를 통해 공격의 진화를 겪었고, 이를 통해 내집단을 규정하고 ‘타자’를 인식하며 더 나아가 그들을 살상하는 능력을 발달시켰다. 이러한 진화의 양상은 공유된 신앙으로 정의하거나 정당화하는 현대 국가 간의 갈등에서도 드러난다.

고디 슬랙(과학 관련 자유기고가. <뉴 사이언티스트>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마더 존스> <와이어드> <시에라> 등에 기고)
우리는 타인이 경험하는 것을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것처럼 느끼도록 설계된 신경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경학적 측면에서 볼 때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실제로 우리에게 발생한다.
“나와 타인은 한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인 안에서 자신을 인식해야만 한다.” 마르코 야코보니가 한 말이다. 그러나 야코보니는 동양의 신비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신경학자이자 UCLA의 정신의학과 교수이고, UCLA의 아맨슨러블리스 브레인매핑센터의 경두개자기자극연구소 소장이다. 그는 평범해 보이는 신경세포로 구성된 망상 조직이 뇌의 전운동피질과 하두정엽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다른 뇌세포와 달리 이 거울신경세포들은 무엇인가를 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이 같은 일을 하는 것을 관찰할 때 두 피질 모두를 자극한다.
야코보니와 라마찬드란이 다루는 질문은 역사적으로 철학자와 신학자에게 국한된 문제였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뇌의 물리적 세계와 마음의 경험적, 심리적 세계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자아란 무엇이며, 외부 세계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세계를 학습하는가? 어떻게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늘 알 수 있는가? 언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어떻게 진실에 접근하는가? 윤리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다루는 데 있어서 신경학은 수백 년 동안 씨름해왔던 철학적, 신학적 접근법에 영향을 미친다. 신경과학은 (갈릴레오처럼) 우주 내의 위치나 (다윈처럼)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물론 뇌과학도 이 두 가지에 대해 할 말이 많겠지만 말이다)에 대한 질문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신경과학은 경험의 본질을 다룬다. 다시 말해, 어떻게 타인을 아는가, 왜 자아가 있는가, 왜 지금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가, 왜 현재 믿는 것을 믿는가, 왜 하는 것을 하는가에 관한 문제의 본질을 다룬다. 만일 라마찬드란이 옳다면, 그리고 인간 진화의 최고 성과물인 자아의식이 타인의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고 그의 마음을 알려는 인류 조상들의 노력을 특징으로 하는 진화상의 혁신에 바탕한다면, 인간에게 이타성과 연민과 선함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라마찬드란은 감정이입의 뿌리에 있는 거울신경세포를 ‘간디 뉴런Gandhi neurons’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타인을 이해하거나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항상 친절이나 연민이 생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라마찬드란에 따르면 거울신경세포는 타인의 마음과 감정을 읽도록 돕지만, 이를 통한 나의 행위는 결정을 담당하는 전두엽피질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한편 여전히 개인이다. 그러므로 고프닉의 말대로 타인과 나의 신경세포가 공통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인간의 조건과 연관시키는 비약은 결국 은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거울신경세포를 통해 가능해진 은유는 그 자체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능력 중 하나다. 그러므로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라. 그리고 인간의 상호연관성이 21세기를 지배하는 은유가 된다면, 22세기까지 인간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지리라.

루이스 월퍼트(왕립학회 석학 회원FRS, 런던 유니버시티칼리지 세포발달생물학 명예교수)
종교와 신비적 사유는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의 원인을 알고 싶어 했던 인류의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발생했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을 설명하는 믿음을 구성하려는 근원적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종교는 그중 일부다. 인지적으로 절박한 이 현상은 도구를 제작하게 한 인과적 믿음이 인간의 생존에 이득을 주었기 때문에 진화했다. 인간 진화의 추동력은 테크놀로지였고, 인간은 물리적 대상의 인과관계를 믿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분된다.
‘믿음belief’이라는 단어는 정의하기 쉽지 않다. 믿음의 한 가지 특징은 상식과는 달리 믿음에 대한 확신에 늘 등급을 매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의 가치는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은 물리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의 도구이고, 그것은 인간의 뇌에 각인되어 있다.
도구와 관련된 인과성에 대한 믿음과 언어가 진화하자, 인류는 불가피하게 질병과 기후변화에서 죽음 그 자체까지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던 모든 사건의 원인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일단 인과 개념이 생겨나자 무지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니었고, 이로 인해 종교적 신앙이 발생했다.

스티븐 미슨(영국 리딩대학 고고학 교수, 인간과환경과학연구소 소장)
일반적으로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유일신이든 다신이든 영혼이든 유령이든 애니미즘이든, 초자연적 작용인(作用因, agent)에 대한 믿음이다. 파스칼 보이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략적 작용인”이라는 유용한 재정의를 신에 대해 내렸던 반면, 여기서는 지식과 의지와 목적을 생명 없는 실체에 귀속시키는 행위도 종교적 사유의 중요한 요소로 포함시킨다. 그런 점에서 하비 화이트하우스가 종교적 사유를 “이미지”와 “교리”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구분한 것은 유용하다.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종교적 사유의 이 두 가지 방식을 찾아내는 데는 난제가 많다. 그나마 교리와 관련된 방식이 더 용이한데, 이러한 방식은 장기간에 걸쳐 공유된 기념비 구조물과 우상의 성격을 띤 상징을 창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들이 반드시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기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게다가 종교적 사유의 교리적 방식은 5,000년 전에 비로소 처음 나타났던 국가 규모의 사회조직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선사시대 사가들은 주로 화이트하우스의 이미지적 방식에 속하는 종교적 활동에 대해 설명한다.
호모사피엔스 내에서 종교적 사유 능력이 그 자체로 재생산의 이점을 제공했는가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종교적 사유 능력은 ‘결정’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실성을 제공함으로써 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는 이점을 제공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인지적 유연성이 종교적 사유의 경향을 제공해주었다는 것이다.

티머시 테일러(영국 브래드퍼드대학 고고학 교수, <세계선사> 편집장)
다윈이 말년에 보인 종교에 대한 유보적 태도는 사랑하는 딸이 죽고 난 후 그가 겪은 신앙의 위기가 아니라, 그의 이론 체계가 신에게서 직접적인 설계자의 역할을 박탈함으로써 익숙하고 편안한 사고방식을 붕괴시켰다는 사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이론 체계는 고도로 추상적인 철학적 방식을 제외하고는 신도, 그 어떤 대체물도 시각화할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고도로 철학적 방식의 가능성을 인정했던 점으로 보아 다윈의 사상 체계는 성직자 친구들과 지인들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완곡한 무신론이라기보다는 열렬한 불가지론을 반영한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주변에 존재하는 것을 변형시키는 물질문화를 이용함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 다른 생물들을 능가하여 이제는 그들을 설계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간의 구조적 결함, 기이한 발달과 지체로 점철된 물질문화의 진화와 생물학적 진화 사이의 오랜 상호작용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다윈도 알았더라면, 다윈도 이 주장에 동의했을 것이다. 우리가 합목적성과 숨은 설계자 등의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무언가를 완성하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탁월한 특성이 아니던가.

앤드루 뉴버그(펜실베이니아대학 방사선의학, 정신의학과 부교수, 종교학과 조교수)
현대사회의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를 고려할 때 중요한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인간 구조의 어디에서 기원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결국 과학과 종교는 둘 다 세계를 다루고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사유 체계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종교는 명백히 서로 다른 근본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쟁점은 어떻게 인간으로서 세계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두뇌야말로 다양한 정보와 아이디어를 선명하고 일관된 세계관으로 해석해내는 인간의 기관이다. 그러나 근원적인 역설은 생각하고 이해하는 내용이 외부에 존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지 여부를 결정할 때조차도 자신의 두뇌를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생존을 위해서는 둘 사이에 정확한 대응 관계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두뇌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확성보다는 적응성이 더 타당하다.
믿음의 힘은 종교와 정치계에서 아주 명백히 나타난다. 우리는 자유와 평등과 해방과 같은 인간애의 다양한 측면에 대한 믿음이 일부 세상의 위대한 사회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인종적 우월성에 대한 믿음, 반목하는 종교나 정치 체제는 광범위한 갈등과 증오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의 힘을 고려할 때 믿음이란 무엇이며 믿음이 뇌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믿음은 “증명하지 않아도 무엇인가가 존재하거나 특별히 진실이라는 느낌”을 의미한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증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결국 증명 또한 개인의 관점에 상당히 의존하는 것이다. 철학자에게 증명이란 특별히 복잡한 합리적 주장이다. 의학자에게 증명이란 무작위로 추출된 이중맹검시험이다. 그러나 종교적 영적 믿음에 대해서는 무엇이 증명인지 엄청나게 많은 주장이 존재한다. 무신론자들은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신자들이 신을 믿는지 질문한다. 반면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아이의 탄생이나 결혼, 색다른 경험들을 거론하면서 삶 속에 신이 존재한다는 수많은 ‘증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어떤 증거가 ‘증명을 구성하는가’는 그 이전에 존재했던 믿음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무신론자와 신앙인은 우주의 본질과 증명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 다르지만, 이들의 믿음은 모두 결함이 있을 수 있다. 인지신경학자로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정의를 선호한다. “생물학적, 심리학적으로 정의할 때, ‘믿음’이란 두뇌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진실이라고 간주하는 모든 지각이나 인지나 감정이다.”
뇌는 믿는 기계다. 우리는 모두 삶의 양상에 대한 믿음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뇌에는 잠재적 결함이 많기 때문에 뇌에서 생기는 믿음은 현실의 존재를 정확히 반영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더 잘 믿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지각적,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영향에서 발생하는 믿음에 도전해야 한다. 또한 나의 믿음과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좀더 공감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내게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인식하고, 나의 뇌 전체가 본질적으로 무한한 세계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를 해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뇌가 믿는 기계라면 믿음이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삶 또한 믿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성의 경계에 있는 인간이 인간의 뇌가 창조 행위를 하고 있다는 믿음에 의해 궁극적 정의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credo ergo sum”라고 바꿀 수 있다.

데이비드 슬론 윌슨(뉴욕주립대 빙엄턴캠퍼스 생물학, 인류학 교수)
1960년대 집단선택이 거부된 이후로 40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순진한 집단주의는 여전히 피해야 할 오류이지만, 집단 간 선택은 더 이상 무조건 거부할 수 없다. 집단선택의 필요성은 진화론의 다른 주요 가설들과 더불어 사례별로 평가해야 한다. 집단선택에 대한 증명은 일정한 빈도로 주요 과학 저널에 등장하고 있다.
2006년 7월 6일 <네이처>에 보고된 사례에 따르면, 벤저민 커가 이끄는 일군의 미생물학자들은 자동화학분석에 흔히 쓰이는 96개의 홈이 파인 웰플레이트well-plate에 박테리아(대장균)와 바이러스 포식자(세균 분해 바이러스)를 배양했다. 각 웰플레이트에서 자연선택은 가장 탐욕스러운 종에게 유리했지만, 이들은 자기 먹이를 멸종시켰고 그로 인해 스스로 멸종했다. 더 신중한 바이러스들은 각 웰 내에서는 탐욕스러운 변종에게 속수무책이었지만, 집단으로서는 더 오래 살아남았고 다른 웰까지 장악하는 경향이 있었다. 웰 간의 이주는 로봇이 피펫을 조절하여 이루어졌다. 생물학적으로 개연성 있는 이주 속도로 인해 신중한 바이러스 종은 집단 내의 선택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전체 개체군 속에서 존속할 수 있었다.
2006년 12월 8일에 보고된 <사이언스>의 두 번째 사례에서 경제학자 새뮤얼 볼스는 다윈이 그렸던 그대로 집단 간의 선택이 인간 종 내에서 이타성의 유전적 진화를 촉진시킬 만큼 강했다고 평가했다. 에드워드 윌슨과 함께 내가 리뷰에서 요약한 이 사례와 다른 많은 사례는 도킨스에 의해 완전히 묵살되었다. 도킨스는 여전히 집단 내 이타주의의 선택적 불이익 때문에 집단 간 선택에는 문제가 있다는 주문만 반복하고 있다.

이언 리더(영국 맨체스터대학 일본학 교수)
종교가 본디 위험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최근의 논란을 읽어보면, 한쪽 끝에는 리처드 도킨스,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다른 쪽 끝에는 종교를 긍정적으로 보는 키스 워드와 찰스 킴벌이 있는데, 맹인들에게 코끼리를 묘사해보라고 요청했다는 불교의 이야기 한 토막이 떠오른다. 맹인들은 저마다 코끼리의 일부를 만져보고는 자기가 만져본 부분이 전체라고 생각한다. 머리를 만졌던 사람은 코끼리가 항아리 같다고 하고, 다리를 만졌던 사람은 기둥 같다고 하는 식이다. 결국 이들은 서로 다른 의견으로 싸움까지 벌인다. 이 이야기는 한 가지 차원에 집착하는 것이 어떻게 온전한 이해를 막는 무지의 길인가를 예증하는 한편, 어떤 주제의 한 가지 측면을 전체로 바라보는 시각이 불합리하고 비과학적이며 어리석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도킨스와 해리스와 히친스는 종교의 다양한 측면 중 단 하나, 폭력 행위만 포착해서 코끼리를 만지는 맹인처럼 종교 전체를 표현하기 위해 그 측면을 이용했다. 그들의 수사修辭에서 ‘종교’는 그 자체로 생각이 있는 실체, 비합리적이고 1차원적이며 폭력을 유발하는 실체다. 따라서 히친스는 종교의 ‘인위적’ 성질을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종교가 자신만의 독립적 목소리를 가진 자연물인 것처럼 대한다. 가령 종교를 ‘그것’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이 자신의 활동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러한 수사에는 ‘종교’의 복잡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으며, 도킨스와 해리스는 ‘종교’와 일신론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히로코 카와나미(영국 랭카스터대학 종교학 교수)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서양 합리주의자들이 종교를 개인적인 영역으로 제한시키면서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된 것 같다. 종교의 중요한 기능은 망각 속에 사라졌고, 거대한 ‘머리’가 ‘마음’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합리성과 과학을 강조해도 인간의 조건은 향상되지 않았고 인간 이성의 전지전능함에 대한 신념만 커졌을 뿐이다. 결국 도덕성과 수양과 타인에 대한 존중과 공동선의 개념에 구현된 속성들은 상실되었다.

존 헤들리 브룩(옥스퍼드대학 이안램지센터 소장, 신학과 자연과학 혹은 신학과 사회과학 학제 간 연구 진행)
인문학자보다 과학자들이 더 많이 저지르는 실수가 하나 있다. 종교 체계의 중요한 기능이 설명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교의 기능이 실제로 설명적인 것이라면, 과학과 종교가 영역 싸움을 벌일 위험은 훨씬 더 커진다. 과학적 합리성의 승리를 짓밟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는 그다지 불편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의 주요 종교들은 이와는 다른 것을 제공했다. 즉, 영적 변화, 희망, 고통과 맞대면하기 위한 원천, 인간 존재를 (단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제공해왔다. 마찬가지로 과학자가 종교를 설명적 가설들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전제를 근거로 종교의 믿음을 공격한다면, 그것은 오류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려해야 할 실용주의적 관점이 있다. 종교적 믿음과 과학적 결론 사이에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모순을 고집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대다수의 과학 이론들은 궁극적으로 자연 과정에 대한 기술이므로 종교적 감수성을 침해할 필요가 없다. 분별력 있는 유신론자는 신비적 현상들에 대해 자연주의적 설명이 가능하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열광적 무신론자들을 더 위협적 존재로 간주한다. 종교적 믿음에 대한 대중 설문에서 영적 의미를 찾고 있다고 고백한 사람들은 불가지론의 범주에 속하는데, 이들은 확실한 영적 믿음을 갖고 있거나 교회에 속한 사람들과는 대조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학탐구를 신성불가침 영역에 속한 결과가 아니라 탐구의 과정으로 파악한다면 과학 탐구야말로 의미를 찾는 영혼과 가장 가까운 유비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윌리엄 H. 캘빈(워싱턴대학 의대 교수, 뇌와 진화와 기후변화를 다룬 수많은 대중서적 작가)
인간의 지성이 최근에 밝혀진 대로 결함투성이라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추론과 믿음의 오류들이 심리 텍스트를 채우는 기능을 한다. 5만 년이라는 세월이 유전자의 변이와 자연선택의 초기 문제를 교정하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전히 개선이 필요한 원시적 존재다. 호모사피엔스 버전 0.8이라고 할까. 그러므로 조만간 외계인과 마주하게 된다면, 인간은 오래도록 해결하지 못한 정신 구조의 문제 때문에 방해를 받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인간의 기술보다 50년 이상 앞선 기술은 죄다 마법처럼 보일 테니, 외계인을 만난다면 당황할 게 뻔하다. 그러니 외계인과 접촉한 후 진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인류에게 시간이 많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세스 쇼스탁(외계지적생명체탐사SETI 수석 천문학자)
사유하는 외계인이 존재하며 인간이 그들과 접촉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부침을 거듭해왔다. 그리스인들은 여러 개의 우주를 상상했고 각각의 우주에 지적 존재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오늘날의 평행우주 개념을 연상시키는 풍부하고 스케일이 큰 철학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철학자들과 우리를 갈라놓은 2,000년의 세월 동안 지구 이외의 세계에 외계인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은 그다지 힘을 얻지 못했다. 적어도 서구의 기독교 사회에서는 그러했다.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폭넓은 관점은 그동안 인간이 창조주인 신에 의해 선택되었고, 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육화와 지혜에 의해 특별한 은총을 받는다는 생각과 양립할 수 없었다. 호모사피엔스가 창조의 정점이라는 이 오만한 준거틀과 공존했던 또 하나의 완고한 가설이 있었다. 그것은 수백 년간 우주에 대한 지식의 단골 자료였던 신학이었다. 신학적 사고방식은 태양계의 구조, (완전하고 흠 없는 구라고 여겼던) 태양과 달 표면의 특징 등의 문제를 결정하는 요소는 관측이 아니라 종교라고 생각했다. 진리는 자연계를 관찰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칸트적 개념은 저지당했을 뿐만 아니라 무가치했다.
변화는 르네상스를 통해 도래했다. 태양계를 주의 깊게 측정한 결과는 신학에 근거한 기존의 모델과 큰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이후 200년도 채 되지 않아 실제적인 기초과학에 대한 이해가 나타났다. 아이작 뉴턴의 물리이론은 요하네스 케플러의 초기 작업을 일반화한 것이었고, 케플러의 행성운행법칙은 스승이자 선배였던 덴마크의 티코 브라헤의 정확한 측정에서 비롯되었다. 우주를 이상화했던 종교적 개념과 달리 관찰에 근거한 지식 접근법을 통해 인간은 세계를 더 만족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현상을 예측하는 놀라운 능력도 얻게 되었다. 이전에 본 적 없는 것을 예측하는 힘보다 더 강한 흥미를 끄는 과학적 측면은 없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앙은 지구상의 사회에는 거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종교는 단지 우리가 이 험악한 시대에 살아남도록 도움을 받기 위해 만들어낸 인공물일까? 그렇다면 신은 형언하기 어려운 은하계의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사는 인간이라는 특정 종이 만든 것에 불과한 것인가? 그 대답은 우리가 이 우주에 홀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닌지 그 탐색 결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수학이 인간의 ‘발명품’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외계인도 수학을 습득하고 이해하리라 가정한다. 아마도 신학도 이와 비슷한 진실을 품고 있을 것이다. 이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외계인들에게 물어보는 것일 테지만.

데이비드 윌킨슨(세인트존스칼리지 학장, 영국 더햄대학 신학, 과학 강사. 왕립천문학회 석학 회원)
다윈의 유산은 생물학자와 신학자의 마음속에 있는 설계론을 붕괴시켰지만, 지난 40년간 설계론은 우주론을 통해 부활했다. 이는 우주의 법칙과 인류의 균형, 그리고 과학자들만 알고 있던 근본 법칙과 경이로운 경험의 명료함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통찰을 통해 다윈의 유산으로부터 교훈을 얻는 수정된 자연신학이 나올 수 있을까? 가장 근본적인 수준의 우주의 성질은 종교적 믿음으로 이어질까, 아니면 신이 없다는 증거로 이어질까? 19세기의 진화론 논쟁이 자연선택과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믿는 해석 사이의 충돌에 관한 것이었다는 점은 늘 반복되는 이야기다. 이에 따라 다윈의 유산은 기독교 교회가 ‘창세기’에 대한 비유적 해석과 어떻게 타협해야 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19세기 기독교 신자들의 주요 쟁점이 아니었다. 19세기 초반 대부분 신실한 기독교도였던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 이상이라는 것을 이미 증명했다. 지구의 나이가 성서에 기록된 것보다 많다는 것은 그들에게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초기 교회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 때부터 ‘창세기’의 초반부는 줄곧 비유적 방식으로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 가령 칼뱅은 신이 진리의 계시를 인간 지성의 사유와 개념에 맞게 조율했고, ‘창세기’ 1장은 ‘과학적 관점에서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누구인가와 주로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에서 7일 창조론, 즉 우주의 나이가 수천 년에 불과하다는 믿음은 20세기적 현상인 셈이다. 다윈의 유산은 대화를 닫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창조와 인간의 의미와 과학적 경외감이라는 더 큰 질문에 대한 대화를 여는 것이리라.

마이클 오브라이언(미주리대학 인류학 교수, 인문학 학장)
사실 수많은 사람들은 과학과 종교를 혼동한다. ‘과학자’인 동시에 ‘신자’일 수 있는가에 대해 끝도 없어 보이는 현재의 논쟁은 피곤한 말싸움일 뿐만 아니라 지적 사기다. 이러한 논쟁은 인간이 주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고안해낸 세 가지 위대한 의미화 체계, 즉 과학과 종교적 믿음(그리고 상식)을 영악하게 혼동시킨다. ‘혼동’이라는 말은 순화된 표현일 수도 있다. 우리는 늘 과학과 믿음의 극단적 양극화를 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른 편 사람들이 제공하는 이야기에 겁을 먹을 때 그 반대편으로 강하게 끌려간다.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형편없는 미국 과학의 지식 상태를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탓으로 돌리는 편이 양극화에 기여한 사람들이 과학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종교가 과학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과학자들의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유신론자들이 곳곳에 숨어서 50개 주의 과학 커리큘럼을 가로채려 하고 있다는 리처드 도킨스, 데넷을 비롯한 연구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과대망상에는 동의할 수 없다. 미국의 심장부에 살면서 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과학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시험관과 실험실 매뉴얼을 십자가와 《성경》으로 대체하기를 노리는 창조론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과학을 지적설계에 근거한 교과 과정으로 대체하기만을 바라는 ‘지적설계론자’가 있긴 하지만, 사실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자연계를 설명해주기만을 바라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학에 대한 이해 가능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보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정의상 진화론자가 될 수 없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편이 훨씬 쉽다.
리처드 도킨스가 제안했던 티셔츠용 표어처럼 “생명은 임의적으로 변이를 일으키는 복제자의 계획적 생존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식의 전문용어를 과시적으로 남발하면서 거리를 행진하는 한 과학자들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추종자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얼마나 지적인 존재인가를 과시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라면 정신을 쏙 빼놓는 이런 어려운 표어는 꽤 효력이 있을 것이다. 참 불행한 상황이다. 과학자로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왜, 어떻게 인간이 신앙을 구성하는지 이해하도록 돕는 데 과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신앙이 유효한가를 결정하는 데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으며, 그렇게 설계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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