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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세계를 전복하는 사상 입문

광뢰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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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세계를 전복하는 사상 입문/ 히로세 준 지음 ; 김경원 옮김
개인저자 광뢰 순= 廣瀨 純, 1971-
김경원= 金京媛, 1964-, 역
발행사항서울: 바다출판사, 2013
형태사항286 p.: 삽화; 22 cm
원서명 蜂起とともに愛がはじまる
ISBN 9788955616552
일반주기 본서는 "蜂起とともに愛がはじまる : 思想/政治のための32章. c2012."의 번역서임
분류기호 181.12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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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디스토피아와 함께 봉기가 시작되고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새 세상을 외치던 젊은 열정들이 한없이 그 몸을 움츠리게 됐다. 희망을 품고 반짝거렸던 작은 반딧불들이 맥없이 사그라지게 됐다. 열정은 분노로, 희망은 냉소로 변해 서로를 물고 뜯을 뿐이다. 이 책은 이러한 위기와 불안으로 가득 찬 이 시대를 견디고 돌파하고자 하는 발언이다. 혁명은 기껏해야 ‘왕년 타령’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아포리즘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이 세상은 어리석은 자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을 설득하여 조금은 나은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도, 그들로부터 패권을 빼앗아 오는 것도, 그들 전부를 숙청하여 어리석은 자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하나같이 불가능하다. 어리석은 자들이 좌지우지하는 이 세상의 치욕은 우리 자신이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으로만 씻어낼 수 있다. 이 책에서 ‘봉기’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언가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디스토피아를 뒤바꾸는 자유로운 몸짓을 가리킨다.

혁명은 이제 ‘왕년 타령’일 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디스토피아와 함께 봉기가 시작되고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


새 세상을 외치던 젊은 열정들이 한없이 그 몸을 움츠리게 됐다. 희망을 품고 반짝거렸던 작은 반딧불들이 맥없이 사그라지게 됐다. 열정은 분노로, 희망은 냉소로 변해 서로를 물고 뜯을 뿐이다. 이 책은 이러한 위기와 불안으로 가득 찬 이 시대를 견디고 돌파하고자 하는 발언이다. 혁명은 기껏해야 ‘왕년 타령’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는 아포리즘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이 세상은 어리석은 자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을 설득하여 조금은 나은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도, 그들로부터 패권을 빼앗아 오는 것도, 그들 전부를 숙청하여 어리석은 자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하나같이 불가능하다. 어리석은 자들이 좌지우지하는 이 세상의 치욕은 우리 자신이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으로만 씻어낼 수 있다. 이 책에서 ‘봉기’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언가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디스토피아를 뒤바꾸는 자유로운 몸짓을 가리킨다.

혁명은 이제 ‘왕년 타령’일 뿐
이 시대를 살아갈 방법은 ‘봉기’에 있다


저자는 이 시대를 ‘혁명 불가능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혁명으로는 형편없는 영화 같은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시대를 살아갈 방법을 혁명이 아닌 봉기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혁명은 무엇이고, 봉기는 무엇인가?
혁명은 특정 지도자와 당이 있고, 대다수가 동의해야 하는 사상이나 규칙이 필요하다. 특정한 자격이나 지식이 있다고 여겨지는 소수가 다수를 이끈다. 또한 혁명은 문제를 ‘해결’하고 이상을 ‘실현’하는 ‘성공’을 통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그대로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세대다. 부채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는 일은 이미 불가능해 보이고, 원자력 발전 반대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는 언제 그칠지 모르는 방사능이 여전히 쏟아지고 있다. 새 세상을 도모하는 혁명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저자의 태도는 냉소적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을 믿는 일을 포기하지 말고 우리 개개인의 잠재력을 맘껏 뿜어내자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 희망을 향한 행위가 바로 봉기다.
봉기는 특정 지도자와 당이 필요 없다. 언제 어디서 누구나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갖는 것이다. 봉기는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제어’하는 것이다. 해박한 지식이 없어도 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해도 좋다. 엄숙할 필요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삶 그 자체가 즐거운 투쟁이 되는 것이 바로 봉기다. 봉기는 체제를 바꾸는 것이 아닌 뒤흔드는 것이다.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봉기로 세상을 괴롭히자. 나로부터, 너로부터, 우리 모두로부터 봉기는 가능하다.

가라타니 고진, 아사다 아키라를 잇는 젊은 지식인
최첨단의 사상을 대담하게 읽어 내는 히로세 준


현대 철학과 영화론을 전공한 젊은 지식인 히로세 준은 《사상으로서의 3?11》로 국내에 알려진 바 있다. 이 책은 예술과 철학, 정치와 사상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해온 그의 대표작이다. 히로세 준은 지식이나 자격, 해결책이나 정답을 요구하는 기득권 체제에 반기를 들면서, 어느 누구나 모든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지적 해방을 강조해 왔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혁명과 다른 봉기의 가치를 모두가 모든 것에 대해 평등하고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것에서 찾고, ‘일상적 봉기’에 수렴하는 담론들을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재치있게 분석하고 있다. 장기 불황, 정치 개혁, 미래 불안 등으로 몸살을 앓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사상적 지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들뢰즈를 빌어 시작과 끝이 있는 선분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사라지는 두더지를 혁명에, 일상과 분리되지 않은 유동적인 시간을 쉼 없이 기어 다니는 뱀을 봉기에 비유한 것은 2013년 뱀의 해를 맞은 우리 사회가 참고할 만한 지적이다.

노동과 봉기
탈출구 없는 평생 노동의 시대, 완전한 노동 해방의 가능성을 찾다


일을 그만둔 노동자는 진정 ‘일을 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 오늘날 직장에 다니지 않는 것은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할까? 저자는 노동과 삶의 문제로 서두를 연다. 히치콕의 〈새〉와 68혁명 그리고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우주 통조림〉을 빌어 자본에 포획되어 벗어날 수 없는 노동의 굴레를 말한다. 〈새〉에서 히치콕이 시도한 것은 ‘만국의 새’를 한 마리도 빠짐없이 하나의 쇼트 안에 가두는 것이다. 새들의 습격을 피해 여주인공이 유리로 된 전화박스 안으로 도망친 장면을 가리켜 ‘새는 새장 바깥에, 인간은 새장 안에’라고만 해서는 부족하다. 그것은 전화박스의 유리를 360도 전방위 스크린처럼 이용해 만국의 새를 한 마리도 남김없이 찍는 것이기도 하다. 새들은 새장을 탈출했지만 곧 히치콕의 쇼트 안에 다시 갇힌 것이다.
68혁명도 마찬가지다. 젊은이들은 ‘공장’이라는 새장에서 탈출했지만, 그 순간 세계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공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세계=공장’에 다시 갇히게 되었다. 공장이나 사무실 같은 특정 공간에만 노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노동의 장, 자본제 생산의 장이 된 것이다. 9시부터 6시까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입사부터 정년퇴직까지와 같이 특정한 시간에만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간 전부가 노동의 시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공장을 탈출한 젊은이들은 다시 자본의 힘에 갇혀 히치콕의 새와 같은 처지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게 통조림의 내용물을 꺼내고, 통조림의 라벨을 안쪽에 붙여 다시 밀봉한 아카세가와 겐페이의 〈우주 통조림〉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혁명의 역동성을 그대로 자신의 힘으로 반전시키는 세계 자본의 놀라운 힘에 의해 탈출 또는 혁명은 무색해져 버렸다. 이러한 글로벌 프레임에 ‘바깥’은 없다. 예전의 실업은 ‘공장=새장’이라는 프레임에서 방출되는 것을 의미했지만, 프레임인 공장의 벽 자체가 글로벌화한 오늘날에는 실업자도 취업자도 동일한 프레임 안에서 산다. 자본제 생산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실업과 취업의 구분은 일을 하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닌 임금을 받는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저자는 완전한 노동 해방의 모습을 장뤼크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와 〈여자는 여자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블로우 업〉,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 찾는다. 그리고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작업 라인으로부터 벗어나는 봉기를 호소한다. 또한 《도라에몽》의 진구를 통해 신자유주의 개혁의 거대한 힘과 고용 불안의 문제를 독특하게 풀어내고 있다.

원자력 발전과 봉기
말할 권리를 박탈당한 시대, 평등하고 자유로운 발언권을 갖는 데서 봉기는 시작된다


히로세 준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시대의 징후를 원자력 발전에서 찾는다. 원자력 발전을 두고 ‘제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지만, 사실 원자력 발전은 ‘제어’밖에 할 수 없는 것, 즉 해결이 불가능한 사건이다. 원자력의 민생 이용이 시작된 1950년대 후반 이래 우리 사회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에서 문제를 제어하는 사회로, 답의 사회에서 문제의 사회로 이동했다. 원자력 발전은 그 자체가 사고이고, 그 사고는 이미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즉 피폭자의 몸속에 새겨진 히로시마의 번쩍은 종지부가 아니라 줄임표이며,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는 현재진행형이다.
저자는 2011년 4월 10일의 고엔지 데모를 예로 들어 봉기를 ‘모두가 모두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원자력 발전 반대를 주장했던 고엔지 데모에는 원전 사건 피해자, 활동가, 일반 시민 등이 참여했고 소규모 오케스트라, 펑크락 밴드, 기모노 행렬 등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기에서 저자는 특정 자격이나 지식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만 발언할 수 있다는 기존의 생각, 자신의 이해관계가 얽힌 특정 문제만으로 투쟁의 장을 한정했던 기존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모두가 모든 것에 대해 말하는 평등을 봉기라고 일컫는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약품 공해 문제, 팔레스타인 문제, 문학사, 현대 사상과 같은 모든 일에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 진정한 봉기인 것이다. 저자는 고엔지 데모를 주도한 조직 ‘아마추어의 반란’이 원자력 발전을 대체할 에너지가 무엇이냐는 언론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대답하여 비판을 받은 사건에 대해 답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답을 제시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면서 고엔지 데모는 전위 정당이 제안한 새로운 답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혁명적 행위가 아닌 문제를 삶 속에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봉기라고 정의했다.
한편, 자크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 비판’을 원전 사고 유언비어 사건과 연결 짓는다. 음성중심주의는 언어에는 의미와 진리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는 전제, 즉 믿을 만한 언어와 그렇지 않은 언어가 있다는 인공적인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인터넷에 떠도는 동일본 대지진에 관한 유언비어를 삭제하라는 지시를 내린 도쿄전력의 행태에 그대로 적용된다. 도쿄전력은 원전 사고에는 소문과 진상이 따로 있다는 인위적인 구별을 전제하고, 유포되어 사고를 일으킨 담론에 대해 저것은 우리 내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멋대로 만들어진, 즉 도쿄전력이 일으킨 사고와는 관계가 없다는 식으로 배제했다. 원자력 발전 사고를 내부와 외부로 나누고, 거기에 관한 담론을 소문과 진상으로 구분하는 것은 도쿄전력이 져야 할 책임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축소하려는 꼼수에 불과하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이념과 봉기
이념 없이 살 것을 강요하는 시대, 그래도 봉기의 불씨는 퍼진다


저자는 봉기라고 부를 만한 세계 곳곳의 움직임을 제시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운동이다. 사파티스타들이 인터넷을 통해 발신하는 언어는 현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하는 정보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의 언어는 수사적 표현으로 넘쳐 나는 시(詩)와 같다. 전 세계의 사람들은 그들의 시적인 표현에 매료당했고, 직접 그들을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곳에서 대면한 것은 모두 같은 복면을 쓰고 이미 인터넷에 게재된 글을 다시 봉독할 뿐인 사파티스타였다. 촬영도 녹음도 엄격하게 제지당했다. 사파티스타는 맨얼굴을 드러내고 육성으로 실상을 호소하는 방식으로는 무언가를 실현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다큐멘터리를 믿지 않는다. 그들은 픽션의 힘을 믿는다. 여기에 사파티스타 운동의 참신함이 있다. 얼굴을 가린 채 같은 복장을 하고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파티스타 운동은 얼마 전에 타계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닌자 무예장〉을 연상시킨다. 닌자이자 혁명가인 가게마루가 몇 사람으로 증식해 가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도대체 누가 가게마루냐고? 우리 모두가 가게마루다”라는 내레이션으로 막을 내린다. 이것은 눈만 빠꼼히 내놓은 마르코스가 누군지 궁금하다면 거울을 들어 자기 얼굴을 보라는 마르코스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이어서 2010년 연금 개혁을 둘러싼 프랑스 시민들의 투쟁과 귀를 막고 돌아선 사르코지 정권의 대립을 알랭 바디우를 통해 바라본다. 우리의 적은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라는 쌍을 유일하게 가능한 사회 체제라고 선전하고, 이념을 갖지 않고 살아가는 일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여기에 대해 참답게 사는 것은 이념을 갖고 사는 일이 가능하다느니 불가능하다느니 하면서 적이 고정적으로 그어 놓은 경계선을 밑바닥부터 뒤흔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가는 것이며, 그 과정에 우리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결의가 바로 봉기이다. 연금 개혁을 둘러싼 프랑스 시민의 봉기는 이념을 갖고 참답게 살겠다는 외침이기도 하다.
또한 저자는 2011년 5월에 시작된 스페인의 봄을 통해 스페인의 봄을 촉발시킨 아랍의 봄을 역조명했다. 두 봄 모두 기존의 정당이나 특정한 리더가 없이 청년들을 중심으로 SNS를 통해 고도의 확산성을 확보한 수평적인 운동이다. 이들은 특정 문제가 아닌 세계를 움직여 온 기존의 정치 경제 시스템 전체에 물음표를 붙이고 'No'를 들이밀었다. 이 둘은 문제를 제기하고 공유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봉기이며, 문제를 해결하고 답을 공유하려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혁명과 다르다. 혹자는 아랍의 봄을 가리켜 민주주의의 성숙이 더딘 후진국에도 드디어 선진국과 같은 의식이 싹을 틔워 ‘독재 체제’를 타도했다고 평하는데, 애당초 ‘독재 체제’는 아랍을 비롯한 제3세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많은 선진국이 보여 주는 양대 정당제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선거 제도 역시 독재적이고 과두적이다. 아랍의 봄은 ‘민주 혁명’ 따위가 아니다. 희망하는 직장에 취직하지 못하고 과일 노점상을 하던 20대 청년이 장사 밑천을 몰수당하고 절망 속에 분신자살을 한 사건에 대해 젊은이들이 크게 공감함으로써 아랍의 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랍의 봄은 청년의 운동, 프레카리아트의 운동이며, ‘불안정’, 더 정확하게 말하면 ‘준(準)안정’ 위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이 기존의 시스템 전체를 거부하는 운동인 것이다. 지역적으로 특수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지중해 건너편에도 탄력적으로 불이 옮겨붙었고, 나아가 유럽과 세계의 모든 도시에도 가뿐하게 불씨를 퍼뜨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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