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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김경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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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김경만 지음
개인저자김경만= 金敬晩
발행사항파주: 문학동네, 2015
형태사항267 p.: 삽화; 23 cm
ISBN9788954636292
서지주기참고문헌(p. 256-261)과 색인수록
기금정보주기2012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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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오랫동안 하고 싶었지만 한국 학술문화에서는 하기 어려웠던 이야기
“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지적 도발’이라 부르고 싶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과학의 궤적을 이렇게 날카로운 입장으로 ‘비판’하는 작업은 일찍이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다. 이러한 작업 자체만으로 하나의 학문적 성과다. 그는 자신이 세계 학계에서 이룩한 확고한 ‘이론적 배경’과 ‘학문적 성과’가 있기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엄밀한 방식으로 한국 사회과학을 점검한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도 ‘글로벌 지식장의 하비투스’를 체화한 연구집단이 출현하기 위해 이러한 비판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의 증언은 이 시대의 중요한 기록이다. 아울러 한국 사회과학이 새로운 수준에 이르렀음을 확인시켜주는 작업이다. ____강신표(인류학자, 인제대학교 명예교수)

【개요】

세계 학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사회학자 김경만 서강대 교수의 논쟁적인 책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과학지식사회학, 과학철학 전공자답게 그간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영역의 난해한 이론서를 주로 출간했던 저자가 이번 책에서는 한국 사회과학계, 나...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오랫동안 하고 싶었지만 한국 학술문화에서는 하기 어려웠던 이야기
“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지적 도발’이라 부르고 싶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과학의 궤적을 이렇게 날카로운 입장으로 ‘비판’하는 작업은 일찍이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다. 이러한 작업 자체만으로 하나의 학문적 성과다. 그는 자신이 세계 학계에서 이룩한 확고한 ‘이론적 배경’과 ‘학문적 성과’가 있기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엄밀한 방식으로 한국 사회과학을 점검한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도 ‘글로벌 지식장의 하비투스’를 체화한 연구집단이 출현하기 위해 이러한 비판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믿고 있다. 그의 증언은 이 시대의 중요한 기록이다. 아울러 한국 사회과학이 새로운 수준에 이르렀음을 확인시켜주는 작업이다. ____강신표(인류학자, 인제대학교 명예교수)

【개요】

세계 학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사회학자 김경만 서강대 교수의 논쟁적인 책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과학지식사회학, 과학철학 전공자답게 그간 전문화되고 세분화된 영역의 난해한 이론서를 주로 출간했던 저자가 이번 책에서는 한국 사회과학계, 나아가 학술문화와 지적 풍토 전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칼을 들이댄다. 과거에도 우리 학술문화를 쇄신하고자 하는 학문적 시도는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과감하고 도발적인 비판, 이토록 뜨거운 학문적 열망을 표명한 책은 없었다. 망설임 없이 핵심에 육박하는 주장은 힘차고 거침없지만 그 이면에선 자기해부의 고통 또한 감지된다. 그의 진정성 어린 고언은 한국 사회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예외 없이 자신도 겨누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강신표, 김경동, 한완상 등의 원로 사회과학자나 강정인, 조한혜정 같은 중견 사회과학자를 향한 비판은, 글로벌 지식장에 참여해 지그문트 바우만, 앤서니 기든스, 로익 바캉 등 세계적인 학자들과 소통과 논쟁을 거듭하며 학문적 성숙에 이르는 과정이 서술된 자기민속지와 절묘하게 조응하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여우와 신포도’ 같은 핑계나 빈말이 아닌, 진정한 학문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장의 구조를 변형시켜 세계 학계에서 우리 이론을 창출해낼 수 있는가에 대한 묵직하고 깊은 성찰적 울림을 준다.

밀도감 있는 서술로 채워진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1부는 “우리는 왜 세계적인 학자를 배출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 “한국적인 것, 토착적인 것의 추구”라는 답을 제시했던 대표적인 국내 학자 다섯 명의 주장을 요모조모 뜯어 반박하고, 이들의 논의에 힘입어 한국 학계의 중심 담론으로 자리해온 ‘서구 종속성 재생산 논쟁’이 왜 허구일 수밖에 없는지를 논증한다. 또 서구의 이론은 한국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른바 ‘적실성’ 문제를 부르디외 사회학의 주요 개념들로 적용해 ‘이론의 이해’를 도모함과 동시에 그 오류를 지적하고 한국 학계의 그릇된 관성이 어떻게 구조화됐는지를 논리적으로 밝힌다. 2부에서는 저자 자신이 세계 학계에 참여해 그렸던 지적 궤적이 자기민속지 서술로 생생히 예시된다. ‘과학전쟁’이 정점에 달한 1980년대 말 시카고 대학에서 과학지식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학문장 진입 초기부터 부르디외의 수제자 바캉과 논쟁했던 최근의 일까지, 세계 학자들과 어떻게 교류를 했고 어떻게 이론적 투쟁을 벌여왔는지, 그 사이 글로벌 지식장의 구조와 동학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학자로서 누린 행복과 고통의 실체는 무엇이었는지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책 소개】

“한국 사회과학의 서구 종속성을 극복하려면 한국 사회에 부적합한 서구이론의 무분별한 차용을 지양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구호가 아니라 서구이론을 대체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다.”
―김경만

서구 종속성 재생산 논쟁의 허구성 - 강신표, 김경동, 한완상 비판

1부 1장에서 이 논쟁을 주도한 강신표, 김경동, 한완상 등 한국을 대표하는 세 원로 학자의 논의를 분석해 그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한다. 서구 종속성 논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저자는 강신표가 김경동을 “문화제국주의 시대의 매판사회학자”라고 몰아붙인 사건을 거론한다. 강신표는 김경동이 외국 이론을 소개하는 일은 잘하고 있지만, 한완상의 사회학과 달리, 그 이론은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의 비판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이라고 본다.
먼저, 김경동은 2차 문헌에 근거해 표절에 가까운 요약으로 외국 이론을 소개할 뿐 잘했다고 볼 수 없다. 김경동의 ‘가핑클의 민속방법론’ 소개가 그 증거다. 다음으로, 한국 현실에 부적합한 외국 이론을 수입해 불필요한 공해를 야기했다는 강신표의 지적은 이론이 효용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부당하게 전제하는데, 이는 이론의 ‘적실성’ 문제라는 잘못된 씨앗을 발아시킨다. 이론을 현실에 마구 적용하는 것은 이론이란 무엇인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경동이 ‘기’와 ‘한’을 이용해 한국사회를 분석한 사례는 그 전형이다. 개념 정의도 없을뿐더러 이론적 검증, 물리적 측정이 가능한 과학적 방법의 구사도 아예 없다. 그렇다면 ‘민중의 사회학’을 주장한 한완상은 강신표의 평대로 제대로 자기주장을 펼쳤을까? 볼로냐파솔라의 ‘지식인은 사라져야 한다’는 선언에 근거한 ‘사회학의 민중화, 민중의 사회학’ 역시 자기모순에 빠져 있긴 매한가지다. 한완상은 민중을 사회화할 어떤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못했으며 끝에 가서는 민중이 아닌 계몽된 지식인의 결정에 의탁하는 자가당착의 논리를 펼치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의 논의는 성급히 문제제기만 하고 치밀하게 따지고 파고드는 학술적 논의가 없는 우리 문화의 슬픈 자화상을 보여준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저자는 이 책 전체에서 다뤄질 주요 논점 몇 가지를 추출해낸다. 먼저 ‘한국적 이론이란 무엇인가’이고, 그다음으로 더 근본적인 ‘이론이란 무엇인가’이며, 마지막으로 ‘이론은 현실에 적합성을 지녀야 한다’는 이론의 ‘적실성’ 문제다.

바깥에서는 통하지 않는 규칙과 기준 - 조한혜정 비판

1부 2장과 3장에서는 탈식민주의를 외치며 우리식 글 읽기와 쓰기를 주장해 선풍을 일으켰던 조한혜정과,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 우리 이론을 만들자고 제안해 토착적 이론을 위한 논의의 종합을 이뤘다는 호평을 받은 강정인조차 이전 세대의 논의를 그대로 답습했다는 비판이 이어진다.

한때 주입식 강의가 아닌 민주적인 대화식 강의로 인기를 끌었고, 또 그 기록을 세 권의 책으로도 출간한 바 있는 조한혜정에 대한 비판은 ‘성찰적인 글 읽기와 삶 읽기’에 집중된다. 그는 말만 앞세운 이런 세미나는 실제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단언한다. 개념 설명과 이해, 비판이 논점과 맥락을 따라 선행돼야 하건만, 중구난방 자의적인 해석과 막연한 주장만 횡행하기에 논의가 헛돌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런 예로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토대와 상부이론’에 관한 조한혜정과 학생들 간의 토론을 자세히 검토한다. 이 강의에선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윌리엄스의 사유를 파악하지 못한 채 자의적인 해석으로, 윌리엄스를 자신이 하지도 않은 말을 한 꼴이 되게 하고 결국 바보로 만들어버린다고 독설을 퍼붓는다.
옳은 독해는 없고 임의적으로 읽으면 된다고 하면서 그런 몰이해를 자율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강의실 안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그 바깥에서는 무의미한 그들만의 옹알이로 그칠 뿐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조한혜정 교수가 연구년에 케임브리지대에 갔을 때, 그들의 세미나 원고가 바로 책으로 출간되고, 이것이 다른 대학 교재로 사용되는 것을 보며 ‘아차’ 했다는 말에 주목한다. 그런 각성이 있었다면 글로벌 지식장의 게임 규칙을 알려주고 그 장에서 투쟁할 역량을 길러줬어야 마땅하건만, 어째서 탈식민지 시대의 글 읽기와 삶 읽기라는 허울뿐인 자율적 읽기만 내세우고 지식장을 멀리한 채 안이한 자기만족에 빠져 진지한 대결을 회피했느냐는 것이다. 이런 의식 기저에는 그렇게 장의 투쟁을 해봐야 우리의 것이 아닌데 그게 무슨 대수냐는 무의식이, ‘여우와 신포도’의 태도가 숨어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지식장의 이탈과 외면은 최근 학계에 부는 대중화 열풍과 연결된다. 대형서점은 ‘식탁류’ 책이 점령하고 있다. 이들 책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① 하나같이 참고문헌 없고, ② 최재천 교수가 주장하는 이른바 통섭이란 명분하에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식의 향연을 제공한다는 인상을 주며, ③ 전문지식을 통조림해 각 장과 절이 지극히 짧게 제시된다. 이것이 지닌 문제는 자명하다. 학문을 상업화하고 저급화의 길로 내몰고, 학자가 글로벌 지식장의 할 대결을 회피한 채 엉뚱하게 대중을 상대로 거짓 위세를 떨게 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이들이 저명한 지식인 행세를 하면서 학문의 장 바깥에서 온갖 이득을 챙기고, 더 나아가 각종 교육과 학술 정책을 좌우하며 지식장을 훼손한다는 점이다.

주제와 개념적 자원의 혼동 - 강정인 비판

이제 강정인의 주장을 살펴보자. 강정인은 서세동점의 시기에 우리가 서구의 영향을 받은 터라 무분별하게 이들의 이론을 수용해왔다면서, 사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아무 반성 없이 그 이론을 수용해 보편화하려 하는 우리의 경향에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면서 존 롤스의 『정의론』이 1960년대의 풍요로운 미국에서는 적합했을지 몰라도 군부 독재와 경제적 낙후에 시달리던 1987년 이전 한국사회에는 부적합하다며, 롤스를 분별없이 가져온 학자들은 “한국의 절박한 현실과 학자의 역사적 사명을 외면한 자기기만이자 현실 도피적인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다른 한국 학자들처럼 적실성을 방패막이 삼아 서구이론에 정면도전하지 않는 우리 학계의 관성을 재확인시켜줄 뿐이다. 특히 강정인이 지적한 “이론은 현실 적용성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하버마스와 로티 논쟁의 전제를 생각해보면 그 오류가 명확해진다. 하버마스와 로티 논쟁의 핵심은 ‘이론과 외부세계의 대응 여부’가 아니라 ‘이론언어의 기능’이었기 때문이다.
강정인의 적실성 비판은 한국 학자들이 혼동하는 또다른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즉 ‘주제’와 ‘개념적 자원’ 사이의 차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학자들이 무분별하게 서구이론을 차용해서 ‘한국사회의 절박한 문제들이 이론화의 계기’를 갖지 못했다는 강정인의 지적, 그러니까 지금까지 우리 문제를 ‘연구주제화하지 않고’ 서구사회에서 발원한 사회이론에 매몰되어 우리와 관계없는 공허한 논쟁을 벌여왔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반론에 직면한다. 수치로 봤을 때 외국에서 취득한 사회과학 분야의 박사학위 주제는 일반이론에 대한 연구보다 한국에 관한 논문주제가 오히려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도 자꾸 한국사회를 분석해야 한다는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이상한 말이다.
강정인은 서구를 극복하는 대안 전략으로 네 가지(동화, 혼융, 해체, 역전)를 제시한다. 그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혼융의 전략으로, 서구와 한국의 것 중 장단점을 취사선택해 우리만의 이론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한국 학자가 아무리 한국사회를 연구한다 해도 우리는 우리 고유의 개념적 자원이 없기 때문에 결국 서구의 개념적 자원을 가져다쓸 수밖에 없다. 따라서 로크가 필머에게 반기를 들고 사회계약론에 뿌리를 둔 자유주의사상을 정초할 때 영국 바깥의 사상적 자원이 아닌 왕권신수설의 모태인 성서를 재해석하고 재전유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사상적 자원(예컨대 유교 같은 것)을 활용해서 우리 고유의 이론을 만들 수 있다는 그의 얘기는 첫째, 우리가 한국사회를 논의할 때마저 사용하는 개념들은 이미 서구의 것이기에, 그것으로 한국의 사상적 자원으로 논한다는 것은 유기적 총체 안에서 그 고유한 의미를 띤 것들을 왜곡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얘기다. 그 좋은 예가 ‘효’인데, 효는 서구적인 개념으로 환원 불가능하다. 둘째, 그의 말대로 유교를 재활용해 이미 서구화된 우리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비생산적이다. 설령 유교에 입각한 새로운 우리 고유의 이론을 만들었다고 쳐도,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다양한 이론적 기법은 다시 서구의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서구의 개념적 자원과 틀에 젖어 있고 그 언어게임 안에서 움직여왔다. 로크에게 주어진 전통이 기독교였던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전통은 이제 유교가 아니라 서구의 사상, 이미 내생적인 것이 된 서구의 사회과학 개념이다.
요컨대, 아무리 한국적인 것을 부르짖는다 해도 연구주제와 연구영역은 서구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강정인은 혼융의 전략을 써서 유교 전통에 자유주의 전통을 억지로 맞추고 싶겠지만, 그렇게 언제든 서구의 개념적 자원에서 가상적으로나마 퇴실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것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이론이란 무엇인가

1부 4장에선 강신표의 주장을 재검토해 이론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고, 한국 사회과학의 낙후성을 부르디외 사회학의 장이론을 적용해 분석한다. 그럼으로써 지금껏 논자들이 주장한 서구이론은 우리 현실에 적실성이 없다는 비판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재론하고 이론의 이해를 도모한다.
강신표 교수는 2005년에도 중견 사회학자 강수택과 김상준을 거론하며 30년 전의 김경동처럼 그들 역시 수입상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내 세미나에 참석했던 호주 라트로브 대학 스기모토 교수의 “한국에는 한국 현실에 기초하고 한국사회에서 출발한 이론과 방법이 없어 실망했다”는 평가를 소개하며 이론의 기본기를 갖추지 못한 우리 학술계의 비극에 관해 언급한다. 저자는 이런 인식에 공감하지만, 그가 자신의 주장대로 이론의 기본기가 무엇인가는 보여주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특히 강신표 교수가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이론적 준거로 제시한 ‘대대문화문법’의 허점들을 파고든다. 한국인의 문화문법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로 제시된 ‘집단성’ ‘급수성’ ‘연극/의례성’은 이론적인 개념이라고 부르기엔 기본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한 측면이 크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이미 낡을 대로 낡은 발상이고 정작 ‘패거리’ ‘짬밥’ ‘예의상’ 같은 말에 내포된 함의를 세련되게 표현할 것일 뿐, 그가 주장하는 토착이론에 걸맞은 이론적 개념은 아니라고 못 박는다. 그렇다면 이론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이론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려면 이론에 대한 서구이론의 논의, 주로 이론에 대한 서구의 과학철학적 논의들을 참조할 수밖에 없다고 밝힌다. 이론이란 추상적 대상을 구체적이고 접근 가능한 대상을 변환하는 일이다. 따라서 무질서하게 쌓인 다양한 관찰자료들을 관통해 맥락을 부여할 수 있는 개념적인 망을 형성해야 한다. 저자는 본문에서 이론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풍성한 예를 제시한다. 그중 다윈을 한번 보자. 다윈은 갈라파고스 군도의 핀치새 부리들이 섬마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할지 고민했다. 그때 자연선택이란 은유를 창안했다. 그것이 없었다면 아무리 많은 자료를 축적했대도 자료는 종이뭉치에 머물렀을 것이다. “자료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다윈은 맬서스의 인구론과 육종가들의 인공교배에서 자연선택의 은유를 얻었다. 다윈이 활용한 은유는 압력과 선택으로, 전자를 맬서스로부터, 후자는 육종가들로보터 얻은 영감에서 유래한다. 이론은 불가해한 자료뭉치를 설명 가능한 것으로 바꾼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통용돼온 이론의 정의는 “현실을 설명하고 예측하기 위한 명제들의 집합” 정도였지만, 엄밀한 의미의 이론은 “실재나 현실을 잡아내거나 담아내기 위해 고안된 유기적으로 연결된 개념들의 망”이라 할 수 있다. 이 망을 어떻게 짤지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 은유이고, 은유에 따라 개념들의 망뿐 아니라 각각의 관계도 결정된다. 저자는 이를 기반으로 부르디외의 장이론이 한국 사회과학의 현실, 한국 학술문화의 낙후성을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부르디외 이론에서 주요한 다섯 개념을 먼저 소개한다. 장, 상징폭력, 상징자본, 일루지오, 하비투스가 그것이다. 이 다섯 개념은 개념의 유기적 연결망이 부여하는 특정한 의미를 갖는다. 즉 지표성을 띤다. 따라서 한국 사회과학의 현실도 이 다섯 개념이 어떤 식으로 얽키고설켜 작동하는가를 살펴보면 그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우리의 지식장이 붕괴돼 있는 상황을 적절하게 예시한다. 한국 사회과학을 글로벌 지식장 안에 위치시키면, 우리의 위상이 좀더 확실히 드러난다.
첫째, 우리는 이미 서구에서 만들어놓은 글로벌 상징공간에 속해 있고, 그런 탓에 상징폭력에 노출돼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서구의 지적 지배를 받는 중국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 사회과학자만이 아니라 미국, 영국, 이탈리아 같은 서구 사회과학자에게도 공히 적용된다. 둘째, 글로벌 지식장에서 상징폭력의 피해자인 한국 사회과학의 위치를 고려할 때, 한국사회의 유관 적합성이니 실용적 시사점이니 하는 것은 모순된 주장임이 드러난다. 서구에 유학 가서는 외국 이론으로 한국을 연구하고 한국에 와서는 그 이론을 써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가당착의 논리다. 한국적 토픽을 고민한다고 한국적 이론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셋째, 장의 자율성, 즉 현실과 유리된 스콜레적 관점(학자적 관점)으로 구성된 학문공간에서는 학술적인 투쟁도구 외에 장치적 이데올로기적 선동이나 미디어, 사회운동, 지배권력, 대중적 인지도 등을 내장한 트로이 목마가 장내로 들어오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 학자가 학자적 역량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과학계는 수십 년간 ‘경계 허물기’라는 몰두해 그 자율성을 계속 무너뜨려왔고, 그 결과 진지한 학술논쟁을 회피하고도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왜곡된 구조를 형성해왔다. 넷째, 서구 의존성을 넘어서는 전략은 지금까지 진화해온 고도로 추상적인 이론의 망을 통해 형성된 계보나 전통 안에서 논쟁해 창의적인 우리의 이론을 정립하는 것 말고는 없다. 글로벌 지식장 안에서 투쟁하는 것만이 우리의 학술문화를 올바로 세우고 서구 종속성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한 과학지식사회학자가 그려온 25년의 지적 궤적

2부에서 저자는 앞서 1부의 분석과 선언적 명제들이 공허한 울림이 되지 않도록 자신이 글로벌 지식장에 참여해 장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그렸던 지난 25년의 궤적을 자기민속지autoethnography로 적나라하게 예시한다. 이를 통해 그는 서구 종속성 타파의 유일한 길이 지적 콤플렉스 없이 당당하게 서구의 개념적 자원을 받아들이되, 글로벌 지식장에서 통용될 만한 독창적인 이론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재차 강조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한국의 젊은 피에르 하버마스(피에르 부르디외와 위르겐 하버마스를 조합해 저자가 위트 있게 상징화한 이름, 즉 미래 한국에서 나올 가상의 대학자)들이 글로벌 상징공간에서 지적 지배자의 위치에 서길 간곡히 기원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학문적 공과를 빠짐없이 서술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간 과학지식사회, 과학철학, 비판이론 등 사회과학의 세분화된 분야에서 어떻게 학문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산봉우리로 올랐는지 다양한 일화를 소개해 들려준다.
도널드 캠벨, 에드워드 쉴즈 같은 대가로부터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어렵게 1980년대 과학지식사회학 장에서 나름의 자리를 확보하게 됐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학문적 관심사로 어떤 논문을 발표하고 자기만의 이론을 구축하려 애써왔는지가 주요 자료의 도판과 함께 실감나게 그려진다. 저자의 박사학위 제안서에 달아놓은 쉴즈 교수의 빼곡한 논평은, 학자의 공부엔 자기만이 아니라 후학을 보살피는 일까지 포함돼 있음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나, 민속방법론을 몰두하고 나서 발표한 논문에 대한 기든스의 논평, 저자의 『담론과 해방』에 대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평가 같은 글은 학문적 소통이 얼마나 소중하고 한 학자의 성장에 얼마나 큰 밑거름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2부의 압권은 누가 뭐래도 부르디외의 수제자이자 저명한 사회학자 로익 바캉과의 서신 논쟁일 게다. 저자는 바캉의 계몽적 입장을 공격하는 한편, 그를 통해 부르디외를 더 깊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밝힌다.
자기민속지는 질적 연구의 하나로, 자전적인 자기고백의 문학적 성격을 띠는 학술연구의 한 방법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 미국을 중심으로 더 폭발하는 추세에 있고 단순한 방법론을 넘어 학문영역으로까지 발전한 상태다. 이 자기민속지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저자가 세계 학계의 동향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드러내준다. 이 선택에는 본문에 나오는 노먼 덴진과 같은 대가와의 지적 교류도 한몫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부의 비판적 분석과 다른 고백적인 서술이 주를 이루지만 2부의 핵심 역시 우리 학술문화에 대한 성찰이고, 그런 면에서 성취도 실패도 엄정한 객관화를 노리고 진술된다. 내 체험으로 나를 둘러싼 집단과 사회, 세계를 탐구하는 양식인 자기민족지를 통해, 우리는 저자가 그린 글로벌 상징공간의 진풍경을, ‘일루지오’와 ‘집단적 열광’로 이루어진 학문계의 뜨거운 기운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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