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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하지 않는 희망 : 테리 이글턴이 전하는 21세기 희망 메세지

Eagleton, T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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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낙관하지 않는 희망: 테리 이글턴이 전하는 21세기 희망 메세지/ 테리 이글턴 지음 ; 김성균 옮김
개인저자Eagleton, Terry, 1943-
김성균, 역
발행사항서울: 우물이 있는 집, 2016
형태사항387 p.; 23 cm
원서명Hope without optimism
ISBN9791186430187
일반주기 색인수록
본서는 "Hope without optimism. 2015."의 번역서임
일반주제명Hope
Optimism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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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내가 희망하는 희망은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우리는 흔히 낙관주의적인 관점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지금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는 잘 될거야' '희망을 갖는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야' '희망은 맨 마지막까지 사는 법이야' 그리고 노력한다, 맹목적으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또는 기적을 이야기하면서 내게도 기적이 올 것이라고 희망을 한다. '로또가 맞을 것이다'라고 희망한다. 과연 이것이 희망일까?
테리 이글턴은 이런 절망적인 희망을 낙관주의의 허울에 쌓인 희망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희망이 아니다.

낙관주의적 희망은 희망의 포기 의 다른 모습
그동안 우리사회에서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희망을 소홀하게 다뤄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희망을 비굴하게 포기해왔기 때문이다.
희망을 포기하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낙관주의라는 허울을 씌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괴롭히는 절망의 다른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내가 희망하는 희망은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우리는 흔히 낙관주의적인 관점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지금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앞으로는 잘 될거야' '희망을 갖는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야' '희망은 맨 마지막까지 사는 법이야' 그리고 노력한다, 맹목적으로 아무런 근거도 없이. 또는 기적을 이야기하면서 내게도 기적이 올 것이라고 희망을 한다. '로또가 맞을 것이다'라고 희망한다. 과연 이것이 희망일까?
테리 이글턴은 이런 절망적인 희망을 낙관주의의 허울에 쌓인 희망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희망이 아니다.

낙관주의적 희망은 희망의 포기 의 다른 모습
그동안 우리사회에서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우리는 희망을 소홀하게 다뤄왔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희망을 비굴하게 포기해왔기 때문이다.
희망을 포기하는 방법은 다양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낙관주의라는 허울을 씌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괴롭히는 절망의 다른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낙관주의에서 이야기하는 희망은 실현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낙관적이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장미빛안경을 쓰고 사물을 바라보고 장미빛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를 달성하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또는 노력을 해도 전혀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낙관주의로 포장된 희망은 근거없는 희망, 즉 절망이기 때문이다.

희망과 욕망의 차이
희망과 욕망의 차이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 희망한다"는 그저 "나는 그렇게 소망한다"를 의미할 수 있다. 담배 한 개비를 바라는 욕구와 그것을 기대하는 희망 사이에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희망을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랑과 욕망'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그는 '해로운 희망도 이로운 욕망도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희망도 욕망도 도덕적 상태일 수 있지만 둘 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욕망은 대체로 특정한 대상을 바라는 반면에 희망의 목표는 대체로 어떤 상황이다. 그렇지만 상황의 발생을 욕망하거나 더 부드러운 얼굴피부를 희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또한 '누군가에게 희망을 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이 말은 곧 그 사람이 누군가를 '그 사람의 소원을 성취해줘서 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을 사람'으로 신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소유한 것을 욕망할 (그리고 확실히 사랑할) 수는 있지만 희망할 수는 없다'는 말도 유의미하다.

희망은 무엇인가
'인간은 발생하리라고 확신하는 일이 앞으로 발생하기를 희망할 수 없다'
기독교신자들은 신국의 출현을 확실성의 문제로 간주하면서도 신국의 출현을 기대하는 희망을 덕목으로 간주한다. "나는 그렇게 희망한다"는 관용어의 지극히 평범한 용법과 다르게, 그들은 앞으로 발생하리라고 확신하는 어떤 것을 신뢰한다. 사도 바울에게 희망은 메시아의 출현을 끈질기고 기쁘게 확신하면서 기다리는 과정을 의미한다. 라이프니츠의 희망은 그의 우주적 낙관주의에 기반을 두는 것이라서 논쟁을 불허한다. 그의 관점에서 희망은 평온한 확신의 문제이다.
알랭 바디우는 '비난을 불허하는 신학의 정통학설에서 희망은 확실성과 연관되며 신앙은 확신과 연관된다'고 말한다
제인 오스틴이 소설 『설득Persuasion』에서 희망을 "미래를 믿는 명랑한 확신"으로 지칭한 것도 그런 희망을 재현하는 것이다. 기독교경전 『시편Psalms』은 '희망은 꺾이지 않으리라'고 장담하고 사도 바울은 '희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어느 해설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관점에서 희망은 경솔한 낙관주의와 동떨어진 "확고부동한 신념과 설레는 확신"을 수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희망이 '기원祈願하는 성질'뿐 아니라 '실행하는 성질'도 겸비한다. 어느 현대 사상가는 희망을 "어떤 목적의 바람직함과 실현 가능성에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헌신"으로 보면서 심리상태의 일종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오히려 활동의 일종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면 진정한 만족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런 희망소멸상태가 반드시 절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반대로 그런 상태는 절망을 치료하는 가장 강력한 효험을 발휘할 수 있다. 실행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파멸을 예방할 수 있다. 희망의 반대는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용감한 체념정신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쇼펜하워는 '희망은 거짓기대감들로써 평정심을 교란하는 악惡의 근원이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간이 완벽해질 때까지 영생할 수 있다면 모든 결핍에서 해방되면서 모든 희망에서도 해방될 것이고 종국에는 모든 실망에서도 해방될 것이다.
희망은 단순히 목적론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희망을 상실할 수 있어도 절망을 상실할 수는 없다. 비극과 마찬가지로 희망은 '인간이 짊어져야 할 운명'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인간이 운명과 맺어야 할 관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은 적어도 '타인들이 나의 곤경을 보면서 교훈을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하는 희망을 언제나 미미하게라도 품을 수 있다. 더구나 희망은 문화나 교육 같아서 비록 희망을 상실한 인간도 자손에게 유산을 물려주듯이 희망을 물려줄 수 있다.
결국 이글턴이 감지하는 희망은 경박한 낙관주의에 오염된 희망을 정련하고 제련하는 것으로서 '희망과 욕망의 비극적 관계'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저평가되어온 희망의 가치를 상승시켜서 '희망과 절망의 역리적逆理的 관계'를 교차하고 융합한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이글턴이 이야기하는 "진정한 희망"의 여건을 조성하고 에른스트 블로흐의 허망하고 낙관적인 희망에 대항하는 '값지고 현실적인 희망'의 조건을 구성할 것이다. 그렇게 생성되는 희망은 욕망과 비극과 절망을 엄밀하게 직시하면서 낙관하지도 절망하지도 않는 희망이 될 것이다.

번역자 후기

만약 오직 정치의 위기와 자본주의체제의 위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위기와 심지어 때로는 죽음들마저 운위될 정도로 워낙 심하게 퇴락해서 암울하게나 암담하게 실감되는 지역이나 시대가 있다면, 그런 지역에나 시대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희망은 오히려 괴롭게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희망이 기본적으로 "앞일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지고 바람"이나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이고, "바람"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며, "가능성"은 "앞으로 실현될 수 있거나 성장할 수 있는 성질이나 정도定度"이거늘, 희망이 그것을 품는 인간을 괴롭힐 수 있다면, 희망은 불교계에서나 심리학계에서 "욕망"으로 일컬어지는 부정적 심정의 일종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테리 이글턴은 희망이 비록 욕망과 비슷할지언정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의 관점에서 희망이 괴로운 것으로 보일 수 있다면 비극적 성질을 함유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인지 그가 주시하는 "진정한 희망"은 비극과 밀접하게 맞물려서 연동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이는 욕망은 비극을 초래하고 비극은 희망을 제련하여 정련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희망의 이런 비극성은 그리스 신화에서도 극명하게 표현된다. 판도라의 상자는, 적어도 서양에서는, 여태껏 희망을 심지어 인간을 가장 심하게 끝까지 괴롭히는 최후최심악덕 같은 것으로 인식시켜왔으리만큼 비극적인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렇더라도 한편으로는 희망이 "실제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고대에는 '신뢰감'을 의미했다고 설명된"다면, 그리고 '어떤 기대'를 품는 사람의 '바람'이나 '잘될 수 있을 가능성'으로 생각된다면, 어쩌면 이른바 실낱같은 희망마저 불허하는 듯이 보이는 암담한 지역에나 시대에는, 그러니까 언필칭 '희망을 품을 수 있는 희망이나 가능성'조차 도무지 발견되기 어려우리만치 절망스럽고 참담한 지역에나 시대에는, 기묘하게도, 희망은 최후최심악덕이기는커녕 오히려 최후최심미덕의 묘미를 띠고 거듭날 수 있을 듯이 보이곤 한다. 그래서 희망이 절망 속에서 최후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 듯이도 보인다.
이글턴이 감지하는 '희망의 초월성'은 바로 경박한 낙관주의에 오염된 희망을 정련하고 제련하는 이런 '희망과 욕망의 비극적 관계'와 여태껏 의외로 저평가되어온 희망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이런 '희망과 절망의 역리적逆理的 관계'가 교차하고 융합하는 인격과 정신에서 생성될 만한 것이다. 그런 관계들이 바로 이글턴이 상정하는 "진정한 희망"의 여건을 조성하고 에른스트 블로흐의 허망하고 낙관적 희망에 대항하는 '값지고 현실적인 희망'의 조건을 구성할 것이다. 그렇게 생성되는 희망은 욕망과 비극과 절망을 엄밀하게 직시하면서 낙관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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