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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 기회주의적 반공군사독재의 기원을 찾아서

박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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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아돌프 히틀러 : 기회주의적 반공군사독재의 기원을 찾아서 / 박홍규 지음
개인저자박홍규= 朴洪圭, 1952-
발행사항서울 : 인물과사상사, 2019
형태사항154 p. : 삽화 ; 19 cm
ISBN9788959065172
주제명(개인명)Hitler, Adolf,1889-1945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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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등록번호 청구기호 소장처/자료실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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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대중은 무지하고 어리석다”
“국민을 다스리는 데에는 빵과 서커스면 된다”

유대인과 세계를 학살한 기회주의자
“전쟁이 시작되면 정의보다는 승리가 우선이다”
“대중이 생각을 안 하니 통치자들은 얼마나 운이 좋은가?”


히틀러는 희대의 악당인가, 살인마인가? 히틀러는 유대인들의 축재를 독일 대중이 겪는 가난의 원인이라고 규정하고 유대인과 집시들을 대량 추방하거나 학살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패전에 따른 과도한 배상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1930년대 전후의 대공황으로 침몰하는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노동조합 해산과 파업 등을 통해 기업인들에게 더 많은 재량을 주고 아우토반, 병원과 학교, 올림픽경기장 건설 등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었으며 재무장을 위한 군비 확장 정책을 실시해 군수산업을 팽창시켰다.
히틀러는 대공황 때 긴축으로 일관한 바이마르공화국 정부의 정책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농민, 퇴역군인, 중하류층 등을 향해 정치적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1933년 총리에 오른 뒤 ‘오타키(폐쇄적 자립경제)’ 정책과 일자리 우선의 완전고용 정책을 펼치고...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대중은 무지하고 어리석다”
“국민을 다스리는 데에는 빵과 서커스면 된다”

유대인과 세계를 학살한 기회주의자
“전쟁이 시작되면 정의보다는 승리가 우선이다”
“대중이 생각을 안 하니 통치자들은 얼마나 운이 좋은가?”


히틀러는 희대의 악당인가, 살인마인가? 히틀러는 유대인들의 축재를 독일 대중이 겪는 가난의 원인이라고 규정하고 유대인과 집시들을 대량 추방하거나 학살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패전에 따른 과도한 배상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1930년대 전후의 대공황으로 침몰하는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경제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노동조합 해산과 파업 등을 통해 기업인들에게 더 많은 재량을 주고 아우토반, 병원과 학교, 올림픽경기장 건설 등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었으며 재무장을 위한 군비 확장 정책을 실시해 군수산업을 팽창시켰다.
히틀러는 대공황 때 긴축으로 일관한 바이마르공화국 정부의 정책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농민, 퇴역군인, 중하류층 등을 향해 정치적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1933년 총리에 오른 뒤 ‘오타키(폐쇄적 자립경제)’ 정책과 일자리 우선의 완전고용 정책을 펼치고 국제연맹 탈퇴, 수입품에 대한 관세 인상 등 수입 통제로 국내 산업 보호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집권 당시 30퍼센트대였던 실업률은 1939년에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로 바뀌는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히틀러는 어떤 정견이나 이념이나 원칙이나 주의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기회주의적 반공군사독재자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기회주의자였다.
독일에서는 일찍부터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반유대주의는 더욱 극심해졌고, 그 풍토 속에 히틀러가 등장했다. 히틀러는 탁월한 연설과 천부적인 선전선동에 능했는데, 그는 자신을 ‘영웅을 위한 선동가’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독일을 구할 영웅이라고 믿었다. 라디오 연설에서도 국민 상호간의 대립을 극복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박멸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유대인의 공민권을 박탈하고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성교와 혼인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면서까지 철저하게 유대인들을 탄압했다.

나치와 25개조 강령

1920년 2월 24일, 2,0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맥줏집에서 나치당의 ‘25개조 강령’이 발표되었다. 그것은 히틀러가 아니라 경제학자 고트프리트 페더가 작성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집필할 때 전술적 문제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고쳐 책에 수록하기도 했다. 1920년의 강령에는 당시 혁명의 열기가 남아 있었던 탓에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가미되어 있었으나, 1927년 이후의 강령에는 그것이 상당히 제거되었다.
25개조 강령의 첫 3개조는 베르사유조약이 새로 정한 독일 국경을 수정하고 국경 밖 독일인을 포함하는 대독일국가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4~10조에서는 독일 국민의 권리 의무를 규정하면서 독일인의 피를 갖지 않은 유대인의 공민권을 박탈한다고 선언했다. 11~18조는 ‘공익’에 관해 불로소득 금지, 이자 노예제 타파, 전시 이득의 완전 몰수, 트러스트기업의 국유화, 대기업 이익배당에 참여, 양로제도 확충, 건전한 중간층의 창설과 유지, 대백화점의 전시 공유화, 소기업 보호, 공익 목적의 토지 무상 몰수, 지대 폐지, 토지 투기의 방지 등이었다. 19~25조는 유물주의적인 로마법 폐기, 빈곤 아동 교육의 국가 부담, 모자 보호, 소년 노동 금지, 청소년 체육 장려, 국민보건 향상, 국민군 창설, 언론계의 유대인 배제, 반유대적인 적극적 기독교, 강력한 중앙집권제 창설 등이었다.
25개조 강령의 내용은 5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인종주의다. 무엇보다도 강령은 독일 민족의 혈통을 지닌 자에 대해서만 독일 시민으로 인정했다. 둘째, 대외 정책이다. 베르사유조약의 즉각 파기와 민족자결권의 보장에 의한 타국과의 동등 규정, ‘대독일 통일’ 규정이다. 셋째, 경제·사회 정책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을 국민의 의무로 규정했다. 넷째, 법과 교육 등의 개혁이다. 법 개혁은 로마법, 즉 나폴레옹 민법전을 폐지하고 유물론적 색채가 적은 게르만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교육에서도 스포츠 교육의 강화와 실생활에 적합한 교육과 공민교육을 포함시켰다. 다섯째, 국가의 형태다. 독일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가야 한다고 규정했다.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는 본래 영어권에서 화재나 참사를 뜻하는 보통명사였으나,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말은 구약성서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라는 함의가 있어 이스라엘에서는 그 대신 파국이나 파멸을 뜻하는 ‘쇼어’라는 말이 사용된다. 홀로코스트의 저변에는 3개의 사상이 있었다. 인종주의, 우생사상, 반유대주의인데 이것은 서로 관련된다. 인종주의는 인간을 생물학적 특성이나 유전학적 특성에 의해 몇 가지 인종으로 나누고 인종 사이에 생래적인 우열의 차가 있다고 보는 편견에 근거한 사고방식, 관념, 담론, 행동, 정책 등을 뜻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정한 최초의 반유대법은 유대인의 공직 추방을 의도한 1933년의 ‘직업관리 재건법’이었다. 유대인이 공직에서 추방되면 반유대적인 법이나 정책을 전개시키기 쉽고, 그 법은 민간 분야에도 파급될 수 있었다.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이라고 불리는 ‘독일 공민법’과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는 법’이 제정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의 법적 지위는 해방 이전으로 돌아갔다.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저명한 유대인들의 망명으로 이어졌다. 그가 1933년 3월 미국으로 망명한 직후인 5월 10일, 국민계몽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유대인들의 저작과 공산주의·사회주의 서적들을 불살랐다.
1938년, 히틀러의 유대인 억압은 더욱 강해졌다. ‘제국 수정의 밤’을 비롯한 끔찍한 사건이 계속 터져 수백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고 3만 명 이상의 유대인 남성이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를 합방한 히틀러의 외교적 성공은 유대인 박해에도 국내외 사람들이 히틀러를 무조건 추앙하게 만들었다. 인구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유대인 문제는 대다수 독일인에게는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1939년에는 유대인을 국외로 추방하는 정책이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되어 그해에만 약 7만 5,000명이 독일을 떠났다.

히틀러는 기회주의자다

1919년 4월, 히틀러는 병사평의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에는 부대마다 병사평의회가 설치되었고, 장병들도 혁명파에서 반혁명파까지 다양했다. 히틀러도 혁명파는 아니었다. 당시 뮌헨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바이마르공화국을 부정하며 소련식 볼셰비즘 정권을 수립했다. 히틀러는 볼셰비즘 정권을 타도하는 데 힘을 쓰기는커녕 그 휘하 대대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기회주의적이고 시류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어도 혁명 좌파에 반감을 품었다. 히틀러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서 볼셰비즘 군사 활동에 참여했다기보다는, 단지 제대하지 않고 가능한 한 군대에 오래 남고 싶다는 이유로 기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히틀러는 재군비와 징병제 도입을 주장하는 한편 국회 연설에서는 평화를 주장하는 등 전쟁주의자와 평화주의자라는 모순된 두 얼굴의 외교정책을 실시했다.
라파엘 젤리히만은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에서 히틀러를 “지난 천년을 통틀어 가장 폭력적이었던 한 정치가”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독재자로서 히틀러는 1,700만 명을 죽여 2,300만 명을 죽인 이오시프 스탈린이나 7,800만 명을 죽인 마오쩌둥보다 못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히틀러가 ‘최근 1,000년의 최대 악당’이라는 소리는 맞는 말인가? 히틀러식의 군사 정복과 독재, 말살과 학살, 계엄령과 특별법정, 노예와 강제노동, 집단수용소와 대양을 넘어가는 이주 등은 영국이나 프랑스 등 모든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수법이기도 한 것이 아닌가? 히틀러는 그것을 흉내낸 것에 불과했고, 굳이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제국주의자들보다는 짧은 시간에 집약적으로 폭력을 행사한 정도의 차이가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문제는 히틀러 개인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히틀러 개인 탓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결국 독일인이 자기 책임을 벗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독재를 용인한 유럽 정치인들과 유럽인들의 책임을 벗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 당대의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럽인들에게도 히틀러가 독재를 하도록 용인한 책임이 있다. 일찍이 해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전체주의 대두의 토양은 대중사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었다. 즉,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와 민족주의가 발달하면서 새롭게 형성된 의식, 강제와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 인간을 개조하고 변형시킬 수 있다는 의식, 국가나 사회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킬 때 비로소 삶의 의미와 의의가 확보된다는 의식이 자리 잡았다.
마찬가지로 허버트 마르쿠제가 주장했듯이 파시즘의 책임 논의에서 더욱 근본적인 책임 소재는 자본주의 자체, 산업문명 자체, 권력구조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전쟁국가, 소비주의, 생태계 위기, 폭력과 냉소주의, 문화와 행정의 대중적 진부함과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는 현대 산업 문명에 그 책임이 있다. 나아가 생명을 파괴하고 오용하고 퇴화시키는 권력구조 자체에 책임이 있다. 나치즘은 독점자본주의의 종양이 돌출한 것으로 한계에 이른 자본주의가 배양한 야만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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