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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3년의 율곡 이이

곽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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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1583년의 율곡 이이 / 곽신환 지음
개인저자곽신환= 郭信煥, 1954-
발행사항파주 : 서광사, 2019
형태사항423 p. ; 23 cm
ISBN9788930640138
서지주기참고문헌(p. [402]-406)과 색인수록
주제명(개인명)이이=李珥, 1536-1584 SLSH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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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오늘 우리에게 율곡은 누구인가? 훌륭하지만 별 관계가 없는 현자인가? 그의 삶과 사상은 아직 유효한가? 그가 오늘의 한국 사회에 있다면 어떤 주장과 처신을 할 것인가?’
숭실대학교 철학과 곽신환 교수가 1970년대 대학원생 때부터 율곡 이이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오면서 줄곧 품었던 생각이다. 40여 년의 교수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율곡의 생애 마지막 1년을 통해 율곡의 철학과 삶을 살펴보고 그로부터 16세기 이후 조선의 정치·사회의 틀과 유학사의 맥락을 폭넓게 들여다보는 책을 출간했다.

1장은 1583년 탄핵의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상황 속의 율곡을 다루었다. 5년간의 산림생활을 마치고 다시 조정에 나온 그가 겪은 모진 삶의 역정을 여러 문헌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그해 조정에서 있었던 갈등, 탄핵 비방 무고자에 대한 율곡의 대응, 그해 늦가을 율곶 강촌마을에서의 관기 유지와의 만남, 탄핵자들이 율곡의 후원자라고 지척한 심통원 심의겸과의 관계, 그리고 율곡 사후에 일어난 비방과 무고에 대하여 살피고 정리하였다.
2장은 율곡이 성리학적 진리 사회의 담지(擔持)자로 살아간 동기와 내용과 진행을 다루었는데, 그가 필부성인론...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오늘 우리에게 율곡은 누구인가? 훌륭하지만 별 관계가 없는 현자인가? 그의 삶과 사상은 아직 유효한가? 그가 오늘의 한국 사회에 있다면 어떤 주장과 처신을 할 것인가?’
숭실대학교 철학과 곽신환 교수가 1970년대 대학원생 때부터 율곡 이이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 오면서 줄곧 품었던 생각이다. 40여 년의 교수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율곡의 생애 마지막 1년을 통해 율곡의 철학과 삶을 살펴보고 그로부터 16세기 이후 조선의 정치·사회의 틀과 유학사의 맥락을 폭넓게 들여다보는 책을 출간했다.

1장은 1583년 탄핵의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상황 속의 율곡을 다루었다. 5년간의 산림생활을 마치고 다시 조정에 나온 그가 겪은 모진 삶의 역정을 여러 문헌들을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그해 조정에서 있었던 갈등, 탄핵 비방 무고자에 대한 율곡의 대응, 그해 늦가을 율곶 강촌마을에서의 관기 유지와의 만남, 탄핵자들이 율곡의 후원자라고 지척한 심통원 심의겸과의 관계, 그리고 율곡 사후에 일어난 비방과 무고에 대하여 살피고 정리하였다.
2장은 율곡이 성리학적 진리 사회의 담지(擔持)자로 살아간 동기와 내용과 진행을 다루었는데, 그가 필부성인론(匹夫聖人論)을 실천한 사람이라는 데 초점을 두었다.
3장은 율곡이 이학(理學)의 비조로 추앙되는 주돈이의 태극론 곧 ‘본원(本源)론’을 어떻게 이해하고 추존했는지를 다룬 것이다.
4장은 율곡이 내심 가장 존모했던, 그와 비견되는 철학자 소옹에 대한 이해와 수용을 다루었다. 율곡 역시 소옹처럼 광활(曠闊)한 마음과 사통팔달의 철학을 추구했고 성취했다는 내용이다.
5장은 천지만물의 주재자(主宰者)와 인간의 삶에 닥치는 화복(禍福)에 관한 율곡의 견해를 다루었다. 그는 무고나 탄핵도 천지의 조화 속에 있는 사건으로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할 것이 못된다는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6장에서는 율곡이 이해하는 자연을 실리(實理)·실심(實心)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7장은 율곡의 진유론 속에 담긴 행도(行道)와 수교(垂敎)라는 두 개념으로 그의 삶을 해명했다.
8장은 율곡과 도의지교의 관계에 있는 성혼과의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사귐을 다루었다.
9장에서는 율곡학의 천양(闡揚)과 확산에 가장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평가되는 송시열의 율곡 존숭과 그 지수(持守) 및 변통을 다루었다.
10장에서는 한말 화서학파의 율곡 사상 조술을 다루었는데, 화서학파는 율곡 사상의 19세기적 용출이라고 보았다.
11장에서는 한말의 대학자 전우가 퇴계 성리설의 만년정론이 율곡이 주창했던 내용과 일치한다고 한 관점을 소개하였다. 전우는 율곡이 퇴계의 만년정론을 보지 못했기에 그의 주장과 부합, 일치하는 것을 알지 못했고 퇴계·율곡의 문하들이 다툰 것은 스승의 학술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저자는 율곡에게서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의 사상에 토대를 둔, 세계와 인간에 대한 긍정적이고 통합적인 태도와 함께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화복(禍福)에 대한 소행(素行)적 자세를 눈여겨본다. 율곡은 누구라도 진리의 구현자가 될 수 있고, 속임이 없는 마음과 참된 이치를 추구하는 태도로 주어진 처지에서 해야 할 도리를 찾아 온전히 구현하는 자가 거룩한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갔다. 이러한 율곡의 사상과 삶의 태도는 오늘의 사회를 더 높고 멀리 나아가게 할 우리들의 책임과 사명감을 일깨운다.


『1583년의 율곡 이이』 리뷰

1583년(선조 16, 계미년) 한 해 동안에 사헌부와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헌, 대사간이 각각 11차례나 교체되었다. 홍문관과 더불어 언론 삼사(三司)라 불리는 이들 기관의 장들, 조선 유교 정치의 꽃이라 불리기도 하는 대표적 청환(淸宦) 요직의 수장들이 왜 이렇게 자주 수모스럽게 교체되었을까? 이 해, 계미년의 사건들에 주목하여 쓴 조신들의 일기체 기록이 여럿 있다. 『계미기사(癸未記事)』, 『계갑일록(癸甲日錄)』, 『계미진신풍우록(癸未晉臣風雨錄)』 등이 그것이다. 무슨 까닭에 이 해의 기록이 많은가? 그 비바람의 중심에 율곡 이이가 있다.
율곡은 1584년 정월 16일에 병으로 서거했다. 그러니 1583년은 사실상 율곡 이이 생애의 마지막 1년이다. 1583년, 율곡은 병조판서로서 새해를 맞이하였다. 연초부터 두만강 주변에서 여진족들이 대규모 침범을 하였다. 조선에 지속되던 평화의 시기가 끝나고 이민족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미 서까래와 들보가 부패하여 언제든 무너질 것 같은 낡고 큰 집, 기력이 쇠잔한 노인의 근근히 이어지는 숨결 같은 상태가 율곡이 진단한 당시의 국가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무장관으로서 율곡이 시행한 시의(時宜)적 여러 조치, 그리고 조정에서의 그의 처신을 두고 삼사의 관원들이 집요하게 또 가혹하고 황당하게 탄핵하였다. 권신들의 모함과 무력과 암계에 의한 사림 척출이 이제 명분과 도리를 내세운 언론과 문장에 의한 정쟁(政爭)으로 바뀐 것이다.
율곡의 일생 소망과 지향은 성리학적 진리 사회의 구현에 있었다. 오늘 우리가 성리학 체계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율곡의 판단과 실천은 그의 시대 상황에서 최선의 것, 곧 전체(全體)이며 대용(大用)의 체계였다. 그는 참 유자[眞儒]는 안으로 성인의 덕과 밖으로 제왕의 도를 겸하여 갖추어야 하며, 때가 주어지면 나아가 그가 배운 도를 시행하고, 물러서 향촌 산림에 있게 되면 연구, 저술, 교육에 종사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해야 한다고 하였고, 일생 이 말을 스스로 실천하였다. 그는 누구나 다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도통은 이제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 곧 ‘필부성인(匹夫聖人)’론을 품고 있었고, 이를 보급하였다.
율곡은 공적 생활에서 가혹한 모함과 비난과 시비에 시달렸다. 진리의 사람, 의로운 사람이 겪는 시련이 그를 비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환난의 상황에서 자재(自在)하고 의연(毅然)하였다. 소행(素行), 곧 어떤 처지 상황에서든지 자신의 자리를 얻지 못함이 없었고, 구현할 도리를 잃지 않았다. 특히 무고한 탄핵과 비방이 쏟아져도 그는 남에게 변명하지도 않았고 상대에게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는 ‘분노가 일어나면 나중에 생길 어려움을 생각하라[분사난(忿思難)]’는 『논어』의 말을 자주 의식하고 강조했다. 비방과 모함과 탄핵을 천지 사이에서 전개되는 조화(造化) 속의 하나의 일이라 믿고, 묵묵히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며 취할 도리를 극진히 하고 주어진 한계를 수용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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