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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 :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스트와 앙코르 유적의 역사 활극

등원 정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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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앙코르와트: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스트와 앙코르 유적의 역사 활극/ 후지하라 사다오 지음 ; 임경택 옮김
개인저자등원 정랑= 藤原 貞朗, 1967-
임경택= 林慶澤, 역
발행사항서울: 동아시아, 2014
형태사항710 p.: 삽화(일부천연색); 22 cm
원서명オリエンタリストの憂鬱
ISBN9788962620832
일반주기 본서는 "オリエンタリストの憂鬱 : 植民地主義時代のフランス東洋学者とアンコール遺跡の考古学. c2008."의 번역서임
서지주기참고문헌(p. 638-684)과 색인수록
일반주제명Southeast Asianists --France --History --20th century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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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앙코르에 들어가는 것은 이 훌륭한 현요혼미(眩耀混迷)를 훔쳐보는 것이다. 앙코르와 같이 면면히 스스로를 보여주는 고도는 많지 않으며, 더욱이 그 어떤 것도 과거의 사물을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 신비, 희비극, 영화를 충분히 그리워하게 하지 않는다. 앙코르의 모든 문들은 신비유암(神秘幽暗)을 향해 열려 있다. 이 문들의 조각들, 회랑에서 들려오는 무언가의 속삭임, 부근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도 그 불명료한 혼미훤효(混迷喧囂)의 신비를 해명하지 못한다. 안타깝다.”

제 31회 산토리학예상 수상
제 26 회 시부사와 ·클로델상 수상

1. 학술적 의의, 인문학적 품격, 그리고 읽는 재미를 두루 갖춘
일본 교양인문학의 걸작을 만나다!

신간 『앙코르와트 :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스트와 앙코르 유적의 역사 활극』(원제: オリエンタリストの憂鬱)은 제국주의시대 프랑스가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물을 반출하는 이야기를 다룬 근대 고고학사에 관한 책이다. 19세기 중반에 걸쳐 20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 동안 프랑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고고학 조사를 수행하는 일련의 과정에 얽히고설킨 역사...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앙코르에 들어가는 것은 이 훌륭한 현요혼미(眩耀混迷)를 훔쳐보는 것이다. 앙코르와 같이 면면히 스스로를 보여주는 고도는 많지 않으며, 더욱이 그 어떤 것도 과거의 사물을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 신비, 희비극, 영화를 충분히 그리워하게 하지 않는다. 앙코르의 모든 문들은 신비유암(神秘幽暗)을 향해 열려 있다. 이 문들의 조각들, 회랑에서 들려오는 무언가의 속삭임, 부근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도 그 불명료한 혼미훤효(混迷喧囂)의 신비를 해명하지 못한다. 안타깝다.”

제 31회 산토리학예상 수상
제 26 회 시부사와 ·클로델상 수상

1. 학술적 의의, 인문학적 품격, 그리고 읽는 재미를 두루 갖춘
일본 교양인문학의 걸작을 만나다!

신간 『앙코르와트 : 제국주의 오리엔탈리스트와 앙코르 유적의 역사 활극』(원제: オリエンタリストの憂鬱)은 제국주의시대 프랑스가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물을 반출하는 이야기를 다룬 근대 고고학사에 관한 책이다. 19세기 중반에 걸쳐 20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 동안 프랑스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고고학 조사를 수행하는 일련의 과정에 얽히고설킨 역사적·정치적 맥락을 학술적으로 파악하고,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충족하면서도 인문학적인 품격을 아울러 갖추며 흥미진진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본문만 약 600쪽, 주, 그림목록, 참고문헌 및 찾아보기 등도 무려 100쪽이 넘으며, 19세기부터 최근까지의 다양한 고문서 자료를 포함하여 100여 컷이 넘는 사진자료까지 수록하고 있다. 특히 '찾아보기'에는 인명사전에조차 실려 있지 않은 앙코르 유적과 관련된 다양한 인물들뿐만 아니라, 단체명, 연구·교육기관, 저작물, 주요 유적과 예술작품, 기타 사건·법령·주요 개념 등이 아주 자세히 실려 있어, '찾아보기'만으로도 고고학사·미술사에서의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앙코르와트』는 고고학, 미술사, 역사, 정치 등 여러 면에서 두루 읽힐 수 있는 책이다. 책은 2009년에 제31회 산토리학예상과 제26회 시부사와·클로델상을 수상하며 그 학술적 성취를 드러냈다. 보통의 학술서는 딱딱하며 지루한 내용이 주를 이뤄 일반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앙코르와트』는 고고학과 역사 이면에 숨은 제국주의시대 프랑스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기 때문에 두꺼운 분량이지만 쉽고도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다. 독자들은 지적 호기심, 인문학의 품격, 그리고 학술적 가치까지 무려 세 마리의 토끼를 잡고 있는, 중후한 교양인문학의 걸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2. 그들은 아시아에서 무엇을, 그리고 왜 가져갔는가?
제국주의시대 약 100년 동안 앙코르 유적에 남은 수수께끼를 풀다

유럽에서 최초로 앙코르 유적의 유물이 복원·전시된 것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였다. 그리고 프랑스 최대의 아시아미술 컬렉션을 보유한 기메국립아시아미술관, 통칭 기메미술관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아시아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의 1층 전시실에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유적에서 출토된 크메르 조각상이 ‘미술관의 얼굴’로 전시되어 있다. 왜 프랑스의 국립미술관만이 예외적으로 캄보디아미술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것일까? 이곳의 대부분의 조각상들은 187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수집된 것들이고, 이 시기는 프랑스가 캄보디아 등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화하고 있던 시기와 정확하게 겹친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1887년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앙코르 유적은 프랑스의 연구기관에 소속되어 있던 프랑스인 고고학자들이 거의 독점적으로 조사했고, 그로 인해 대량의 유물들이 프랑스로 이송되었다. 앙코르 유적을 재발견하고 최초로 유적을 이송한 인물은 누구이고, 그 이후의 프랑스극동학원이라는 기관은 어떻게 고고학의 본격적인 조사를 주관했으며, 나아가 식민지에서의 고고학적 활동은 어떠한 체제하에서 이루어졌는가 등, 책에서는 이런 의문들에 대해 답하고자 한다.
분명 프랑스가 앙코르 유적을 재발견하고 학술조사를 하여 앙코르 고고학의 기초를 마련했고, 이러한 ‘공헌’이 없었다면 앙코르 유적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세계문화유산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하지만 대량의 유물들과 미술품이 유적지에서 반출되어 프랑스로 강제 이송되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불법적인 유물이송을 법적으로 제한한 뒤에도, 교묘히 법망을 피해 ‘합법적’으로 유물들을 프랑스 본국으로 가져왔으며, 구미 국가나 일본의 미술관에 미술품을 교환하거나 매각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는 20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귀중한 크메르의 미술품을 유적지에서 반출해 프랑스 본국으로 가져온 그 이면에는 심각한 정치적인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책은, 프랑스가 행한 “고고학적 조사의 학술적 공헌과 식민주의시대의 정치적 부채(負債)가 몇 겹으로 겹치고 교차하는 실상”을 사료들을 통해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시대를 대표했던 인물들과 학술기관, 그리고 사건들을 클로즈업하여 자세한 연보 정보와 함께 상술하고 있는 책은, 읽는 이에 따라 학사연표로 활용할 수도 있고, 앙코르 고고학사를 둘러싼 역사 활극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도 있다. 얻기 어려운 미간행 고문서 자료나 시각 자료를 다양하게 수록한 이 책은, 그렇기에 학술적으로도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3. 앙코르 유적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이 펼치는 역사 활극
오리엔탈리스트의 현실과 정치적 역학 관계를 낱낱이 살펴본다

책에는 우리에게 생소할 수 있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인물들에 대한 구체적인 소개와 그들과 얽힌 사건들을 통해 앙코르 유적의 재발견과 발굴, 유물의 반출 및 판매에 관련된 앙코르 고고학사를 다각적이고 편년적으로로 기술하고 있다.
앙코르 유적을 재발견하고 유물들을 프랑스로 이송한 루이 들라포르트는 순수한 유적보전의 차원이 아닌 식민지 고고학의 정당성 차원에서 ‘새로운 보호자(식민지 통치자)’로서 유적보전을 주장했다. 그로 인해 앙코르 유적은 프랑스인들의 입맛에 맞게 새롭게 ‘복원(수복)’되었다. 들라포르트는 그러한 복제품을 학술적인 산물로 인식하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본격적인 인도차이나연구를 위해 탄생한 조사연구기관인 ‘프랑스극동학원’은 식민주의시대에 창립되어 오늘날에도 활동을 계속하는 기관이고, 앙코르 고고학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초대원장 루이 피노는 고고학적 실적이 없는 문헌학자이자 엘리트 동양학자였다. 피노를 비롯한 알프레드 푸셰나 폴 펠리오 등도 신세대 엘리트 동양학자로서 앙코르 고고학 조사에 참여하게 되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학문적으로는 아마추어에 그쳤다. 그들은 식민지 답사 및 조사에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개입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상적인 연구라고 생각했고, 또한 아시아로의 진출을 획책하며 아시아 내에서 프랑스의 존재의 중요성을 호소하는 정치적 차원의 목적에 충실했다.
그 외에도 아캉, 마셜, 파르망티에, 카바통, 카르포, 그롤리에, 그루세, 스테른 등 수많은 인물들이 극동학원과 앙코르보존국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앙코르 유적 조사와 연구에 힘썼다. 식민주의시대의 오리엔탈리스트(동양학자)들은 학문이 곧 정치라고 강하게 자각하고 있었다. 책은, 식민지의 유적에 대해 극동학원은 어떤 조사를 했는지, 유적조사를 위한 법적 제도는 어떻게 정비되어 있었는지, 식민지에 학술기관을 설치한 프랑스의 목적은 무엇이며 어떠한 이상을 내걸고 있었는지를 집중 조명한다.
그러나 책의 목적은 동양학이 얼마나 정치적이었던가를 밝히는 것도 아니고, 정치가 곧 악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것도 아니다. 학문과 정치를 분리시켜 편의에 따라 학문예찬을 하거나 정치비판을 하는 학문사를 극복하고, 두드러지게 정치적이었던 오리엔탈리즘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또한 실제로 인도차이나에서 앙코르 유적을 조사·발굴한 현지조사원들과, 극동학원 멤버로 대표되는 메트로폴(파리)의 엘리트 연구원 사이의 대립에 초점을 맞추며,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갈등과 현실에도 주목한다. 앙코르톰 바이욘사원의 연대고증을, 이전의 학설을 뒤집고 앙코르와트 건설 뒤의 시대라고 주장하며 정설로 구축시킨 필립 스테른의 이야기는, 현장에 있던 조사원들에게 깊은 굴욕을 안겨주며 현지조사원과 엘리트 학자 사이의 대립과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4. 캄보디아의 ‘전통부흥’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근대 고고학과 미술사학에 바쳐진 ‘공물’, 앙코르 유적

앙코르 유적조사 과정에서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소설 『왕도』의 저자 앙드레 말로가 소설의 내용처럼 스스로 앙코르 유적의 도굴을 감행한 사건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극동학원의 독점적 유적조사 체제의 허점을 이용한 일대 해프닝으로서 그 당시 고고학 조사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도굴 사건 이후 법적 체제는 정비·개정되고, 보다 면밀하게 앙코르 유적조사 및 발굴, 그리고 복원의 과정이 이어지게 된다.
1931년 파리 국제식민지박람회에서 자신들의 성과로 보여주기 위한 앙코르 유적과 유물의 복제품이 전시되기에 이르렀는데, 이 중 최고의 이슈는 실물 크기의 앙코르와트 복원물이었다. 과시를 위해 문화유산을 복제품으로 탈바꿈시킨 제국주의시대의 실태를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다. 즉,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는 자신의 권력의 거대함을 상징적으로 과시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관광유치’는 현지조사원의 자금조달을 위한 수단의 하나였고, 결국 다른 나라에 미술품을 판매하는 형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관광객 유치를 위한 ‘놀이공원’으로서 앙코르국립공원이 등장했음을 저자는 유적의 복원 문제를 통해 밝히고 있다. 현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보여주는(전시하는)’ 고고학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고 저자는 설파한다.
캄보디아 내에서 시행한 미술교육은 크메르의 전통문화를 부흥시키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공예품 생산에 의해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현실적이고 공리적인 목적이 있었음에도 주목한다. 서구인의 눈에 맞는 공예품이 생산되어 유물 복제품들이 판매되었고, 이 시기의 각 박람회와 전시회 등은 그러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실증을 지향하는 고고학이 아니라 근대적이고 절충적인 혼종의 양상을 지니고 있었다. 프랑스에 의한 캄보디아 전통문화 ‘보호’는 식민지 지배의 구실에 다름 아니었다. 앙코르 유적조사의 중심에 있었던 극동학원은 20세기 중반이 되면서 조사자금 조달과 박람회 유적 복구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미술품 등을 판매하기까지에 이른다. 저자는, 이렇게 판매된 미술품 등을 근대 고고학과 미술사학에 바쳐진 ‘공물(貢物)’, 그리고 ‘공물(供物)’로 표현하며, 근대 아시아 고고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식민지와 본국 사이에 감춰진 불균형적인 학술적·정치적 권력격차의 문제, 현지조사원들의 성과 부각, 그리고 자금 조달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5. 한국 학자들의 비판과 격려 덕분에 이 책은 완성되었다
오리엔탈리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앙코르와트』 탄생의 배경에는 한국 학자들의 비판과 격려가 있었다. 2006년 서울에서 열린 프랑스극동학원과 캄보디아예술국의 고고학적 활동을 소개하는 강연에서 저자와 한국의 연구자들 사이에는 날선 비판과 논의가 오고갔다. 이러한 열띤 논의와 애정 어린 격려를 덕분에, 저자는 원래 단행본으로 출간 예정이 전혀 없었던 이 책을 출간할 용기를 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서울에서 열린 강연에서 저자는, 유물유출과 관련된 연구자의 활동은 식민지에서의 고고학적 조사수행 과정에서 학술적·정치적 필연으로 생겨난 문제이고, 현지조사원의 잘못으로 책망할 것이 아니라 근대 아시아 고고학과 미술사학의 학문적 구조 자체를 문제로 삼아야 한다는 논지를 밝혔다. 반면, 한국의 동양미술연구자인 김용철 교수(고려대 일본연구센터)는 “식민주의시대에 행해진 종주국의 고고학적 활동은 정치적인 과오의 결과이고, 그 결과를 학술적 공헌으로 평가할 수 없다”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에 저자는, (1) 당시 학자들의 학술적 활동은 제국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 분리할 수 없지만 양자를 혼동하면 안 된다, (2) 인도차이나에서 활동했던 프랑스인 고고학자의 특수한 사정을 생각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러한 활발한 논의는 이 책의 탄생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렇듯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근대 고고학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구미 열강과 일본의 오랜 제국주의시대 속에서 동양의 고고학과 미술사는 분단되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영국은 인도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일본은 한반도를 조사의 장으로 삼아 독자적인 정치적 미술사 구상을 키워갔다. 저자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앙코르 유적 연구 과정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단순히 비난하지는 않는다. 제국주의시대에 만들어진 분단의 구도가 현재에도 영향을 계속 미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앙코르 고고학사 연구를 통해 근대 학문사를 새롭게 묻는 것과 미래의 아시아 고고학·미술사를 구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학문연구 또는 정치비판의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에서 벗어나, 앞으로의 고고학 연구를 생각하는 데에 큰 의의를 있음을 강조한다.
『앙코르와트』는 제국주의시대의 동양학자(오리엔탈리스트)를 통해 근대 고고학의 참모습을 살펴보게 하며, 아울러 식민지하 아시아의 역사를 올바로 바라보며 이해하는 것이 현재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책이다.

6. 『앙코르와트』의 주요 내용 요약

[ 제1장 루이 들라포르트와 앙코르 유적 복원의 꿈 ]
1860년대부터 1900년까지의 앙코르 유적의 답사 상황에 대해, 루이 들라포르트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한다. 재발견된 유적을 프랑스인들은 어떤 눈으로 보았을까, 유적답사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어떠한 과정을 거쳐 프랑스로 유물을 이송했을까, 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등등을 검토한다. 또한 들라포르트는 다수의 앙코르사원의 ‘복원도’나 복제품을 제작했다. 그것들을 분석함으로써 현재와는 다른 19세기의 고고학의 이념과 이상을 밝힌다.

[ 제2장 프랑스극동학원의 창설과 그 정치학 ]
1900년부터 1920년까지의 시대를 다루며, 본격적인 학술조사기관으로 설치된 프랑스극동학원의 설립이념과 활동내용에 대해 서술한다. 식민지의 유적군을 앞에 두고 초창기의 학원은 어떤 조사를 했을까, 유적조사를 위한 법적 제도는 어떻게 정비되어 있었을까, 나아가 식민지에 학술기관을 설치한 프랑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어떠한 이상을 내걸고 있었을까. 아마도 그 이상은 식민지의 정치정책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을 것이다.

[ 제3장 본국의 이념과 식민지 실천의 틈바구니에서 (1) ―현지조사원의 현실 ]
[ 제4장 본국의 이념과 식민지 실천의 틈바구니에서 (2) ―메트로폴의 발전 ]
시대적으로는 동일하게 1900년부터 1920년대를 무대로 하며, 실제로 식민지의 고고학에 종사한 조사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새롭게 창설된 극동학원은 아시아의 식민지 고고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조사에 참가한 구성원들의 대부분은 전통적인 동양학 교육이나 고고학 교육 중 그 어떤 것도 받은 적이 없는, 학문적으로는 아마추어였다. 그들은 식민지에 파견되어 현장 밑바닥에서부터 경력을 쌓아갔다. 한편 프랑스 본국에는 동양학을 공부한 엘리트 연구자가 있었고, 식민지로부터 이송되어온 고고사료나 고미술품을 이용해 현지를 방문하지 않고 현지조사원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고고학적 연구를 전개해갔다. 1920년대에는 파리에도 앙코르 고고학을 연구할 수 있는 교육연구시설이 충실해졌다. 앙코르 유적의 연구를 둘러싸고, 식민지 현지와 본국 프랑스의 이중연구체제가 형성되었다. 양자 간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고, 그것이 앙코르 유적 고고학의 역사를 보다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프랑스 내부의 연구조직의 차이가 현지 유적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게 되는데, 이러한 양상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다.

[ 제5장 앙코르 고고학의 발전과 그 무대 뒤 (1) ―고고학사상의 말로 사건 ]
[ 제6장 앙코르 고고학의 발전과 그 무대 뒤 (2) ―현지의 혼란과 메트로폴의 몰이해 ]
1920년부터 1930년대에 걸친 시기, 즉 앙코르 유적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던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다. 이 시기에 극동학원에 의한 고고학적 조사는 비약적인 진전을 이루게 되는데, 그러한 학술적 성공의 배후에는 비교적 잘 알려진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 사건’과 아주 최근까지 극비사항으로 숨겨져왔던 학원에 의한 고미술품 판매 등 스캔들이나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사건이나 실태를 고문서 자료에 기초해 정확하게 복원한다. 이 사건들은 명백히 식민지 고고학의 부채이며 유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난삼아 스캔들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사 안에 그 사건을 자리매김하여, 왜 문제가 있는 사건들이 이 시기에 잇달아 일어났는가를 분석한다. 그리고 역설적으로는, 부채가 되는 이러한 사건이 실은 고고학의 성공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 제7장 파리 국제식민지박람회와 앙코르 유적의 고고학 ]
파리 국제식민지박람회가 개최되었던 1931년의 파리로 무대를 옮겨, 이 박람회에서 드러난 1930년대의 앙코르 유적의 고고학이 지녔던 제반문제들에 대해 깊이 고찰한다. 이 박람회에는 장대한 등신대의 앙코르와트 복제물이 건립되었다. 정밀한 세부를 그대로 재현했고, 학술적으로도 정확한 복제물에는 극동학원의 조사 성과가 반영되어 있었다. 30여 년에 걸친 학원의 활동을 보여주는 전람회도 개최되었는데, 박람회의 전시관 장식에는 앙코르와트의 도상(圖像) 외에 고고학에 종사하는 조사원이나 원주민도 등장했다. 메트로폴(파리)에서 앙코르 유적과 그 고고학은 어떻게 표상될 운명에 처해 있었는가? 식민지 고고학이 어떠한 방법으로 프랑스의 식민지정책의 허구적인 성공을 방증하는 증거로 이용되었는가를 분석한다.

[ 제8장 앙코르 유적의 고고학사와 일본 ]
1940년대 전반, 즉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앙코르 고고학의 상황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논한다. 1941년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개시하는데, 그 군사행동과 연동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학술기관은 인도차이나와의 ‘문화협력’사업을 전개했다. 프랑스의 연구자와 일본의 연구자 사이의 ‘교수 교환’, 일본의 고미술품과 크메르 유물을 교환하는 ‘고미술품 교환’, 미술전의 교환사업 등이 잇달아 실현되었다. 그리고 다수의 일본지식인이나 미술가, 불교사절, 저널리스트가 앙코르를 참배한다. 일본 국내에서는 앙코르 유적에 관한 저작물도 연이어 간행된다. 일본에서 앙코르 유적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전시(戰時) 중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일본 또한 프랑스에 의한 식민지 고고학과 결코 무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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