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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코노미쿠스, 인간의 재구성

노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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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호모 에코노미쿠스, 인간의 재구성= Homo economicus / 노지승 [외] 지음
개인저자노지승, 1973-
발행사항서울 : 후마니타스, 2018
형태사항336 p. : 삽화, 표 ; 23 cm
총서명INU 후마니타스 총서 ;01
ISBN9788964373200
9788964373194 (세트)
일반주기 공지은이: 오은하, 이상록, 이용화, 장제형, 황병주
서지주기참고문헌과 색인수록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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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등록번호 청구기호 소장처/자료실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1 1350438 809 호35 2관 5층 일반도서 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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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19세기와 20세기 한국과 서구의 텍스트에서 만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초상


이 책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하며 돈으로 표상되는 교환가치를 중요시하는 인간상이지만, 그 조건 안에서 그리고 그 조건에 매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꿈꾸고 작은 유토피아를 간헐적으로 만들어 가려는 충동을 가진 현대인들의 운명적 몸부림까지 포함하고자 했다. …… 18세기 벤저민 프랭클린의 정신을 강박적으로 내화한 로뱅송 크뤼조에, 19세기의 사무직 노동자인 바틀비, 그리고 식민지 자본주의의 비천한 노동자들, 개발 독재 시대의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어 가는 한국인들에게서 저자들은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과 그것이 초래한 인간상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_서문에서

이 책은 자본주의와 인문학의 관계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자 하는 여섯 명의 인문학자들에 의해 기획?집필되었다. 문학과 역사학 전공자들인 저자들은 대학 또는 연구 기관에서 자신들의 학문 분야를 가르치거나 연구하면서, 자본주의사회에서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매일 부딪치며 살아간다. 모든 것이 돈으로 측정되고 평가되는 삶에 ...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19세기와 20세기 한국과 서구의 텍스트에서 만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초상


이 책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하며 돈으로 표상되는 교환가치를 중요시하는 인간상이지만, 그 조건 안에서 그리고 그 조건에 매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꿈꾸고 작은 유토피아를 간헐적으로 만들어 가려는 충동을 가진 현대인들의 운명적 몸부림까지 포함하고자 했다. …… 18세기 벤저민 프랭클린의 정신을 강박적으로 내화한 로뱅송 크뤼조에, 19세기의 사무직 노동자인 바틀비, 그리고 식민지 자본주의의 비천한 노동자들, 개발 독재 시대의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어 가는 한국인들에게서 저자들은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과 그것이 초래한 인간상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_서문에서

이 책은 자본주의와 인문학의 관계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자 하는 여섯 명의 인문학자들에 의해 기획?집필되었다. 문학과 역사학 전공자들인 저자들은 대학 또는 연구 기관에서 자신들의 학문 분야를 가르치거나 연구하면서, 자본주의사회에서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매일 부딪치며 살아간다. 모든 것이 돈으로 측정되고 평가되는 삶에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돈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인간 조건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에 가장 비판적이면서도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장 쓸모없다고 치부되는 ‘인문학’은 이런 모순적 상황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낸다. 대학과 학문이 자본의 지배를 받고 어느 연구자도 자본의 힘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이 더 안정된 환경이며 연구에 유리한 조건인지를 측정하는 표준화된 방식은 바로 ‘돈’이다. 그렇게 강의?집필?연구?행정 등으로 마련된 돈으로 밥을 먹고 여행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연구자들은 동시에 인문학의 상상력과 발상을 낡고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쓴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 책의 문제의식은 바로 우리 자신을 경제적 인간, 즉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명명하며 시작되었다. 고전주의 경제학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경제적 주체를 일컫는 이 말을 이 책에서는 다소 중의적인 방식으로 전유하고자 했다. 이 책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하며 돈으로 표상되는 교환가치를 중시하는 인간상이지만, 그 조건 안에서 그리고 그 조건에 매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꿈꾸고 작은 유토피아를 간헐적으로 만들어 가려는 충동을 가진 현대인들의 운명적 몸부림까지 포함한다. 게오르크 지멜이 돈이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만들고 평준화하지만 동시에 돈이 부여한 영혼 구제의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은 이 책에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부여한다. ‘비루하게 번 돈으로 너 스스로를 해방시켜라.’

이 책은 크게 서구의 텍스트와 한국의 텍스트를 대상으로 한 글로 나뉜다. 오은하, 이용화, 장제형의 글이 유럽과 미국의 문학, 역사적 텍스트에 기반하고 있다면 노지승, 황병주, 이상록의 글은 한국의 문학과 역사적 자료들에 기반하고 있다.
1장 오은하의 글(로빈소나드로 보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표상)은 영국의 새로운 시민계급이자 근면하고 자조하는 근대적 개인의 대표적인 인물형이라 할 수 있는 로빈슨 크루소와 그 로빈슨 크루소를 개작한 20세기 미셸 투르니에 소설 속 로뱅송 크뤼조에를 교차하면서 중상주의 시대에 낙관적이었던 경제적 주체의 상이 투르니에의 개작 속에서 어떻게 내적 강박을 통해 분열적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원작에서 프라이데이로 불리던 방드르디에 대해 로뱅송이 집착한 것은, 서구 제국주의의 또 다른 얼굴인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인간형이 끝없이 지배 대상인 타자를 필요로 하는 분열적 상태였음을 드러낸다고 이 글은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소설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분열적 모습을 보이는 데 그치지 않고 서구가 쌓아 올린 경제적 주체의 상으로부터 탈주하는 모습까지를 포함해 다루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오은하의 글이 서구 제국주의와 경제적 주체상이 서로 깊게 연루되어 있으며 제국주의의 분열적 모습이 곧 경제적 주체의 분열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했다면, 2장 이용화의 글(?필경사 바틀비?에 나타난 호모 에코노미쿠스적 삶에 대한 멜빌의 고찰)은 19세기 허먼 멜빌 소설 속 인물인 필경사 바틀비가 보여 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의 정신을 분석하고 있다. 19세기 중반은 신자유주의 시기로 명명된 20세기 후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바틀비가 일했던 월 스트리트가 19세기에 이미 미국 경제의 허브로 도약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소설에 체현된 멜빌의 문제의식은 현대를 살아가는 경제적 주체들의 문제를 정확히 예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prefer not to”로 표현되는 바틀비의 저항 방식에 대해 소설의 화자가 깨달은 바는, 개인은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최적화된 자유를 소유한다고 믿고 살아가지만 실상은 체제가 설정한 환경에의 전면적이고 자발적인 복종을 통해 죄수로 살아갈 뿐이라는 현대인들의 아이러니한 존재 방식이다.
바틀비가 일했던 19세기 월 스트리트가 자본주의의 완성된 형태를 구현하는 공간, 즉 경제적 주체상이 완결된 이후의 풍경이라면,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란 아직 완결되지 않고 형성 중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3장 노지승의 글(천변의 노동자들과 호모 에코노미쿠스)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얼굴을 바로 초기 자본주의 상태라 할 만한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발견한다. 1930년대 서울 청계천 주변을 배경으로 ??천변풍경??의 저자 박태원은 당시 사회주의가 이념적 주체로 호명하지 않았던 또 다른 종류의 노동자들인 가사 사용인, 여급, 10대 보조 점원 등의 삶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은 고립된 각자의 작업장에서 일하며 무엇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을지를 나름의 방식으로 계산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소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궁리하고 있는 이들을 통해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하고 있다. 당시에 세태소설이라 불린 이 소설에서 행복이란 합리성을 추구한 이후에 얻어지는 결과라기보다는 합리성에 근거를 둔 설계의 과정과 설계 자체에 있다. 즉 이 소설은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계산하며 살아감으로써 자본주의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경제적 인간상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데, 이는 아직 충분히 근대화되지 못한 식민지 조선 사회, 즉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낙관적 시선을 반영하고 있다.
노지승의 글이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인간군을 그려낸다면 황병주와 이상록의 글은 각각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박정희 개발 독재 시대와 뒤이은 신군부 정권은 한국적 자본주의의 원형적 모습을 간직한 시대이다. 특히 4장 황병주의 글(1970년대 중산층의 소유 욕망과 불안)은 1970년대 박완서의 소설에서 한국 사회의 무의식을 현재까지 떠받들고 있는 ‘이른바’ 중산층의 욕망과 불안을 읽어 내면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한국적 환영이 어땠는지를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중산층들, 부르주아들이 윤리?문화 등의 내적 콘텐츠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소유적 인간으로만 규정되고, 소유와 화폐의 축적으로 자신들을 입증하려 할수록 오히려 주술적 세계를 소환하는 재再주술화 과정을 겪게 된다. 황병주는 박완서의 소설 텍스트가 이런 한국적 환영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의 미덕을 잘 내화했음을 밝히고 있다.
황병주의 글에서 1970년대 한국 중산층의 신경증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5장 이상록의 글(시장, 사회와 인간을 바꾸다)은 1980년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의 중산층들이 87년 민주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정치적 주체로 전화되기도 했던 지점을 주목하면서, 1980년대 중산층의 자유주의가 갖는 양면성을 고찰하고 있다. ‘잘살아 보자’는 박정희 정권의 집단 성장론적 구호는 1980년대에 접어들어 경쟁 사회 속에서 ‘남보다 더 잘살아야 한다’는 개인주의적 욕망으로 전화되었고, 이런 욕망은 평등에 대한 정치적 요구와 직결되었다. 이런 욕망의 주체였던 중산층들은 권위주의 체제가 그들의 자유주의를 제약하고 있으며 자유주의적 공정성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고 인식할 때 정치적 주체인 호모 폴리티쿠스로 변화될 수 있었다. 이들의 요구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서의 삶에 대한 ‘호모 폴리티쿠스’로서의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이 글은 87년 체제의 자유주의적 한계를 암시하고 있다.
6장 장제형의 글(학문의 자기 목적성과 유용성)에서 이 책은 19세기 초에 설립된 독일의 훔볼트 대학으로 날아간다. 현재 한국 대학이 앞다투어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양성하려고 자처하는 상황을 비판하면서도 대학의 위기, 즉 학문의 위기가 비단 21세기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그리고 이런 학문의 위기 상황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훔볼트 대학의 설립 이념과 그 동시대인들의 학문론과 대학론을 통해 직접적으로 알려 준다. 이 글은 학문의 보편성이란 무엇이고 대학의 자기 목적성의 논리란 무엇이며 그리고 대학이 추구해야 하는 ‘유용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했다. 중세 시대부터 뿌리내리고 있던 독일의 대학이 프랑스혁명, 나폴레옹의 침공 등 역사적 대변혁기였던 1800년 세기 전환기에, 대학의 절반 이상이 사라져 버린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거듭났는지를 말하면서 현재 한국 대학에 대해 뼈아픈 비판을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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