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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 기원과 개전

화전 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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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러일전쟁 : 기원과 개전 / 와다 하루키 지음 ; 이웅현 옮김
개인저자화전 춘수= 和田 春樹, 1938-
이웅현= 李雄賢, 역
발행사항파주 : 한길사, 2019
형태사항2 v. : 삽화(일부천연색), 도판 ; 23 cm
총서명한길그레이트북스 ;163
원서명日露戦争 :起源と開戦
ISBN9788935664801 (v.1)
9788935664818 (v.2)
9788935664276 (세트)
일반주기 참고문헌(v.2)과 색인수록(v.1,v.2)
본서는 "日露戦争: 起源と開戦. 上(c2009). 下(c2010)."의 번역서임
주제명(지명)Japan --Foreign relations --Soviet Union
Soviet Union --Foreign relations --Japan
Japan --Foreign relations --Korea
Korea --Foreign relations --Japan
Japan --Politics and government --1868-1912
일반주제명Russo-Japanese War, 1904-1905 --Causes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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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등록번호 청구기호 소장처/자료실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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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351633 081.1 한19 v.164 1관4층 일반도서 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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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전쟁사학의 결정판

러일전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의 대사건이었다. 대한제국은 전쟁 직후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받았고 그때부터 국권 침탈까지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에서는 제국주의 국민이 탄생했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간 러일전쟁에 관해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비교하고 연구한 책은 없었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행동하는 일본의 양심’이라 불리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2는 러일전쟁에 관해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조사한 최초의 책으로 전쟁사학의 결정판이다.
와다는 러일전쟁의 성격을 ‘조선을 지배하고 정복하려 한’ 일본이 러시아와 맞닥뜨려 전쟁으로 ‘몰아간’ 뒤 “조선을 일본의 것으로 한다는 점을 러시아로 하여금 인정하게 한 전쟁이었다”(36쪽)라고 정의한다. 그는 전쟁의 가장 큰 결과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말살하고, 조선 전역을 식민지 지배한 것이다”라고 밝힌다. 전쟁의 명칭은 ‘러일전쟁’이지만 전쟁의 본질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조선전쟁’이라는 것이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전쟁사학의 결정판

러일전쟁은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20세기 세계사의 대사건이었다. 대한제국은 전쟁 직후 을사늑약 체결을 강요받았고 그때부터 국권 침탈까지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에서는 제국주의 국민이 탄생했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열기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간 러일전쟁에 관해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비교하고 연구한 책은 없었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행동하는 일본의 양심’이라 불리는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2는 러일전쟁에 관해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한국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조사한 최초의 책으로 전쟁사학의 결정판이다.
와다는 러일전쟁의 성격을 ‘조선을 지배하고 정복하려 한’ 일본이 러시아와 맞닥뜨려 전쟁으로 ‘몰아간’ 뒤 “조선을 일본의 것으로 한다는 점을 러시아로 하여금 인정하게 한 전쟁이었다”(36쪽)라고 정의한다. 그는 전쟁의 가장 큰 결과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말살하고, 조선 전역을 식민지 지배한 것이다”라고 밝힌다. 전쟁의 명칭은 ‘러일전쟁’이지만 전쟁의 본질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조선전쟁’이라는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에게 보내는 준엄한
경고장이자 단죄의 논고(論告)


이 책을 읽은 한국과 북한의 여러분이 일본제국주의의 교묘한 행보에 관해서, 일본의 침략 때문에 망국의 위기에 떨어졌던 자국의 행보에 관해서 보다 깊이 생각해준다면 기쁘겠다._37쪽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2는 각주를 2,402개나 넣을 만큼 사료를 철저하게 고증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재구성한 서사극(敍事劇)이다. ‘사건’ 중심의 서술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역사의 지류가 ‘어떻게’ 러일전쟁으로 흘러가게 되었는지 밝힌다. 러시아, 일본, 조선, 중국,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그리고 태국 등 9개국에서 700여 명에 이르는 인물이 등장해 사실 관계를 고증한다. 와다는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을 샅샅이 훑는다. 이를 통해 10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따로 떼어 해석할 수 없으며 이 전쟁은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단일 범죄임을 밝혀낸다.
청일전쟁은 ‘제1차 조선전쟁’, 러일전쟁은 ‘제2차 조선전쟁’이었다는 독특한 시각을 제시하는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1, 2는 이 두 차례의 조선전쟁이 한반도 비극의 출발점이 되었음을 명쾌하게 규명하면서, 비극의 서막을 연 역사 법정의 피고(被告)는 반성해야 한다고 준엄하게 질타한다.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1, 2는 일본이 전쟁을 기획, 모의하고 마침내 실행하는 현장을 마치 동영상을 틀어놓은 것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다. 이제까지 밝혀진 것과 달리 러시아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제시했고 일본이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범죄였다는 증거를 장장 1,300여 쪽에 걸쳐 입증한다.
전쟁으로 몰아가던 군국주의 시대에도 침묵하지 않고 평화를 지키려는 양심이 있었다는 사실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이성적 판단이 결핍된 야만의 시대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역사의 법정에 울려 퍼지는 예리하고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 가득 찬 이 대작은 전범(戰犯)을 겨눈 논고의 전범(典範)이다.

일본의 간섭, 지배, 침략에 일관되게 저항한 고종

고종이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서 벗어나 직접 정사를 다스리겠다고 선언한 것은 1873년이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현재까지 고종은 ‘암약’(暗弱)한 인물이고 민비에게 완전히 좌지우지되었다는 게 통념이지만 최근에는 이런 통념을 비판하며 고종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다.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1, 2에서도 고종이 “일본의 간섭, 지배, 침략에 일관되게 저항”(1199쪽) 했으며 이는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사실이라고 평가한다. “분명 고종은 대원군의 정치에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고, 개명(開明)성도 갖추었으며, 백성의 생활에 대한 배려심도 있었다”(127쪽)라는 것이다.

러시아에 접근하는 고종과 일본의 반응
고종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조선의 운명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은 러시아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종주국이었던 청국도 거부하고, 새롭게 밀고 들어오는 일본도 거부했으며, 북쪽의 러시아 제국의 보호 하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의 통치를 확립하는 길을 모색”(1190쪽)하기에 이른 것이다. “고종이 러시아에 처음으로 밀사를 보낸 것은 갑신정변 이전인 1884년 5월이었다.”(128쪽)
이 사실이 전해지자 일본의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격노했다. 그는 1885년 6월 5일 청국 공사 수청쭈(徐承祖)에게 “청국과 일본이 협력해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 외교의 졸렬함으로 인해 귀국과 아국 양국에 화를 초래할 것이 경각에 달려 있다.”(1190쪽) “따라서 조선 왕의 임정(臨政)을 약간 구속하고, 외교상의 망동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1190쪽)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1910년 병합 때까지 일본에 대항하는 고종의 긴 투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태도는 소극적이었다. 러시아는 조선이 어느 국가의 보호국도 되지 않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청일전쟁과 삼국간섭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 청국을 몰아냈을 뿐 아니라 막대한 배상금까지 요구했다. 또한 타이완, 랴오둥반도, 남만주의 할양까지 요구했는데 이는 “제국주의의 기준으로 봤을 때도 지나친 욕심”(1192쪽)이었다.
일본이 만주에 진출하려 하자 러시아가 즉각 반응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압박했고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반환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조선이 러시아에 거는 기대는 높아졌다. “고종과 민비는 러시아의 힘에 의지해 일본의 간섭을 배척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1193쪽)
다급해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획득한’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미우라 고로(三浦梧?)공사가 민비를 시해하는 폭거를 저지른다. 비(妃)를 서민으로 격하한다는 조칙을 내도록 강요받은 고종은 분노해서 아관파천을 감행하는 반격에 나섰다.
일본은 조선에서 힘을 강화한 러시아와 어떻게든 협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선을 남북으로 분할해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하자는 안과 만주와 조선을 교환하자는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이 생겼다.

러시아의 만주 진출
일본은 그동안 소극적인 자세로 ‘만한교환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자 ‘만한교환론’을 강하게 밀어붙인다. 그러자 고종은 대한제국의 중립국 노선을 처음으로 내세우며 일본 정부에게 교섭하자고 제의한다. 이를 “주일 러시아 공사 이즈볼스키(Izwolskii)가 강하게 지지했고, 그의 설득으로 러시아 외무성도 대한제국 중립국 노선을 지지하게 된다.”(1196쪽) 하지만 일본은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1196쪽) 사실 러시아가 만주에 진출했을 때부터 일본은 ‘만한교환론’으로는 만족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일본의 것으로 하고, 더불어 남만주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1197쪽)했다. 이는 완전히 전쟁을 하겠다는 자세였다.

러일교섭
당시 일본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는 즉각 러일교섭을 시도했지만 ‘만주문제’와 ‘조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섭이 아니었다. 고무라는 “교섭의 장에서 조선은 일본의 것이고 일본이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인정하라고 러시아에게 요구한다. 러시아가 이를 거부하면 전쟁을 시작한다. 전쟁은 시베리아철도가 완성되지 않은 지금이 찬스다”(1198쪽)라고 말했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보면 러시아가 일본의 요구를 거부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일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고종은 러일교섭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개전이 가까워진 것이라 생각하고, 1903년 8월 전시 중립을 인정받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1199쪽) 고종은 “8월 15일자로 러시아황제에게 보내는 밀서를 작성했다.”(880쪽)

“만약 전쟁의 막이 열리면 우리나라가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렵다…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귀국 군대의 세력을 도와서, 적[일본군]이 올 때에는 재물과 곡식을 옮겨 감추게 하고, 몸은 산의 계곡 사이에 숨도록 하게 할 것이다….”_881쪽

이는 러시아에게 전시 협력을 제의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고종의 개인적인 소원을 표명한 데 지나지 않았다. 고종은 이 밀서를 쓰고 난 후에 외부대신 이도재(李道宰)에게, 러시아와 일본 양국에 대해서 중립국으로서의 승인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양국의 주재 공사에게 보내는 훈령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고종은 이렇게 전시 중립의 승인을 러시아와 일본 양쪽에 촉구함과 동시에 러시아에게는 제한 없는 연대협력의 의사를 은밀하게 표명했던 것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과 러시아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조인했다. “양국의 평화를 강조한 제1조에 이어 제2조에는 일본의 가장 중요한 전쟁 목적이 적시되었다.”(1210쪽)

“제2조 러시아제국 정부는 일본국이 한국에서 정사상, 군사상 및 경제상의 우월한 이익을 지니는 것을 승인하고, 일본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위함에 있어 이를 방해하거나 또는 이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_1211쪽

일본은 이 결과에 기초해서 움직였다.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서울로 들어가 고종과 한국 정부 각료들을 위협해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만이 무조건 ‘불가’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은 찬성했다.

최후의 저항
이렇게 대한제국은 완전히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통감이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이 협약의 무효를 여러 나라에 은밀하게 호소하는 밀사를 계속해서 파견했다. 그 최후의 노력이 1907년 제2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세 명을 파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의 주최자에 의해서 이 특사들의 회의 참가는 거절되었다. 이토 통감은 이 행동의 책임을 추궁해 고종을 퇴위시켰다.

1907년 7월 19일 고종은 퇴위했고, 황태자가 순종(純宗)으로 즉위했다. 7월 24일에는 제3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통감이 한국 정부 내정의 모든 것을 지도하게 되었다. 보호국화의 완성이었다. 그 시점부터 한국병합까지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고종은 1880년대 중반부터 1919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나라에 대한 일본의 간섭, 지배, 침략에 일관되게 저항했다. 그 저항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평가가 있겠지만, 그 일관된 저항의 사실은 역사의 중요한 요소이며, 그것을 모르면 이 시대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_1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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