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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찰 이야기 : 우리 문화와 역사가 깃든 산사 순례

최종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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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천년 고찰 이야기 : 우리 문화와 역사가 깃든 산사 순례 / 최종걸 지음
개인저자최종걸
발행사항서울 : 다우, 2020
형태사항431 p. : 천연색삽화 ; 23 cm
ISBN9788988964491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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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등록번호 청구기호 소장처/자료실 도서상태 반납예정일 예약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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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사찰 창건 설화 속에는 한국인의 오랜 발원이 들어 있다.
구수하고 재미있는 옛이야기 속 한국 문화의 속살을 만난다.

“얕은 개울물은 큰 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최초의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말이다. 긴 세월 소리 없이 한자리를 지켜 온 천년 고찰이 우리 삶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언론사에 오랜 시간 몸담았던 저자는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스님의 권유로 수행 삼아 천년 고찰 순례를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 그리고 여전히 수행가풍을 간직한 청정도량을 중심으로 전국을 순례했다. 그 과정에서 각 사찰 창건에 얽힌 일화와 설화들은 물론 다양한 유형의 이적과 영험담 그리고 우리 문화와 역사가 깃든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한국인의 오랜 발원을 만나는 일이었으며, 고승대덕들의 깨달음의 발자취를 쫓는 일이자 스스로 떠나는 치유의 여행이었다. 이를 정리해 글을 쓰고 불교 전문지인 <판각>과 몸담은 신문사에 연재를 하면서 5년 만의 긴 순례를 마쳤다. 이 책《천년 고찰 이야기》는 저자가 그 순례 길에서 만난 명산대찰에 관한 이야기다. 대한민국 전역에 분...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사찰 창건 설화 속에는 한국인의 오랜 발원이 들어 있다.
구수하고 재미있는 옛이야기 속 한국 문화의 속살을 만난다.

“얕은 개울물은 큰 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최초의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말이다. 긴 세월 소리 없이 한자리를 지켜 온 천년 고찰이 우리 삶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언론사에 오랜 시간 몸담았던 저자는 어느 날 평소 알고 지내던 스님의 권유로 수행 삼아 천년 고찰 순례를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 그리고 여전히 수행가풍을 간직한 청정도량을 중심으로 전국을 순례했다. 그 과정에서 각 사찰 창건에 얽힌 일화와 설화들은 물론 다양한 유형의 이적과 영험담 그리고 우리 문화와 역사가 깃든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한국인의 오랜 발원을 만나는 일이었으며, 고승대덕들의 깨달음의 발자취를 쫓는 일이자 스스로 떠나는 치유의 여행이었다. 이를 정리해 글을 쓰고 불교 전문지인 <판각>과 몸담은 신문사에 연재를 하면서 5년 만의 긴 순례를 마쳤다. 이 책《천년 고찰 이야기》는 저자가 그 순례 길에서 만난 명산대찰에 관한 이야기다. 대한민국 전역에 분포된 약 천여 개의 사찰 가운데 5대 적멸보궁, 3대 해수관음 성지, 삼보사찰, 미륵 신앙 성지, 지장 신앙 성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등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고찰들을 가려 담았다.
기존 답사기와 기행 책과는 다르게 기이한 일화와 옛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록하다 보니 한 권의 옛이야기 책처럼 구수하고 흥미롭게 읽힌다. 그러나 기이한 영험담과 설화 속에는 우리민족의 오랜 발원과 고승들의 깨달음의 역사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륵 신앙의 성지’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 율사는 출가하기 전 늘 활을 들고 산과 들을 누비며 사냥을 다녔다. 어느 봄날, 사냥을 나갔던 진표 율사는 개구리들을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 놓고는 까맣게 잊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다음 해 전처럼 사냥을 나가던 진표 율사의 귀에 지난해 잡은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들려 가봤더니 개구리들이 여전히 버들가지에 꿰인 채 구슬피 울고 있었다. “내가 어찌 해를 넘길 정도로 개구리를 고통받게 했단 말인가?” 탄식하던 진표 율사는 이 일로 깨달음을 얻고 금산사로 출가했다. 이후 17년간을 몸을 돌보지 않는 망신참회의 고행 끝에 마침내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간자와 계법을 직접 받기에 이르렀고 다시 돌아와 금산사의 중창 불사를 발원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관음 성지인 수덕사는 근래 들어 스러져 가던 근현대 한국 불교의 간화선풍을 다시 잇고 추상같은 정풍으로 불도를 바로 세운 곳이기도 하다. 이 절에 주석했던 경허 선사는 연암산 천장암으로 출가하여 1년 반 동안의 치열한 참선 끝에 확철대오했으며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구나.”로 시작하는 오도송으로도 유명하다. 경허 스님은 1886년에 6년 동안의 보임을 마치고 옷과 탈바가지, 주장자 등을 모두 불태운 뒤 무애행에 나섰고 이후 돌연 환속하여 박난주란 이름으로 개명을 하고,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를 남긴 뒤 입적하였다.


역사 속 고승 선사들의 깨달음의 이야기

해수관음 신앙을 대표하는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기도처 보리암’에는 두 가지 창건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하나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황비인 허황옥 공주의 삼촌 장유 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신라의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다. 서기 683년(신라 신문왕 3)에 원효 대사가 풀집을 짓고 수도하던 중, 희뿌연 광채를 뿜으며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감동으로 보리암을 창건했으며, 《화엄경》에서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인 보광궁에 착안하여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으로 짓고 관세음의 별칭인 보문普門에서 보普를 따와 절 이름을 보광사라고 하였다.
화엄 사상의 발원지인 영주시 부석사에는 의상 대사를 호위한 선묘 보살의 애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신라 문무왕 때 당나라에서 유학 중이던 의상 대사를 연모한 선묘 낭자는 떠나는 의상 대사를 그리워하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이후 ‘이 몸이 용이 되어 의상 대사가 무사히 귀국하도록 돕겠다.’는 원을 세우고 용으로 환생해 의상 대사의 멀고 험한 귀국길을 호위했다. 돌아온 의상 대사가 지금의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에 절을 지으려고 하는데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도적 떼가 문제였다. 의상 대사가 수차례 양보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도적들은 막무가내로 버티며 오히려 스님을 겁박했다. 이에 용으로 환생해 스님을 외호하고 있던 선묘 낭자가 커다란 바위로 변신하여 도적 떼를 위협했고, 결국 도적들은 봉황산에서 쫓겨나 선묘 낭자는 소원대로 의상 대사의 불사를 도울 수 있었다. 그 바위가 바로 부석사 무량수전 뒤편에 있는 부석浮石이다.
우리에게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명장으로 기억되는 서산 대사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서산 대사는 입적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자신의 의발을 전하라고 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스승이 왜 그런 외진 곳을 선택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불가에서 가사와 발우를 보관하도록 전한다는 것은 본인의 법을 전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서산 대사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는데 그 말에 의하면 두륜산 대둔사는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며 ‘종통宗通이 돌아갈 곳’이었다. 스승의 명을 받든 제자들은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워 서산 대사의 사리를 봉안하고, 영골靈骨은 금강산 유점사 북쪽 바위에 봉안한다. 금란가사와 발우를 대둔사에 모신 후로 두륜산 대둔사는 지금의 대흥사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서산 대사의 법맥은 400년이란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후 대흥사는 큰 깨달음을 얻은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불교 이야기 속 당대 역사, 문화, 정치, 사회 모습을 한눈에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시기인 삼국 시대에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개인적인 치병이나 구복의 목적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왕권 강화 목적이 더 컸으며 이를 위해 토속적 무속신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던 지배층을 불교로 교화하려 하였다. 고구려의 아도 화상이 신라에 세운 ‘신라 불교 첫 도래지 도리사’나 자장 율사가 세운 ‘불지종가 통도사’의 창건 설화에 토속신앙의 대상이었던 용이 등장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다. 태조 왕건은 불교를 적극 지원했고 불교 행사인 연등회나 팔관회를 중시했으며, 광종 때부터는 승과를 실시해 나라의 스승인 국사나 왕의 스승인 왕사를 뽑아 왕실의 고문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정혜결사 시작점이었던 ‘국사 도량 송광사’에서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고자 했던 지눌 스님이 정혜결사 장소를 찾던 중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앉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는 지배 세력의 종교였던 불교가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사회 전반에 널리 퍼지게 된 시기였다. 고려 말, 안으로는 부패한 지배세력으로 인해 피지배층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고, 밖으로는 이민족의 침략이 잦아 백성들은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이때 무장 이성계가 신흥사대부 세력과 힘을 합해 조선 왕조를 세우면서 귀족 종교였던 불교를 배척했고 신흥사대부가 수용한 성리학을 사회 지도이념으로 삼았다. 이러한 억불숭유 정책으로 탄압받던 사찰은 이를 계기로 민초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타행 화엄 도량’인 부산의 범어사에 당시 절에 과도하게 부과된 부역 등을 타파하기 위해 아낌없이 보시하고 스스로 호랑이의 밥이 된 낙안 스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가장 한국적인 문화원형으로서의 가치 재발견 ‘사찰 창건 설화’

예로부터 가족 공동체의식이 강했던 우리 민족에게 ‘조상 숭배’는 가장 오래된 민간신앙 중 하나이다. 시체의 훼손을 방지하고 순장을 하거나 시체의 주거지인 명당에 대한 관념이 생긴 것은 유교나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였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조상 숭배’는 가장 한국적인 문화원형이며 한민족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볼 수 있다. 사찰 창건 설화에는 특히 부모의 은혜를 강조하는 이야기가 유독 자주 등장한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따르면 이차돈이 순교한 이듬해인 528년(신라 법흥왕 15)에 법흥왕의 두 어머니, 영제 부인과 기윤 부인이 불국사를 창건하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574년(진흥왕 35)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절을 중창하고 비구니가 된 뒤 불국사에 비로자나불상과 아미타불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재상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한 것으로 나오는데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우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혜능 대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쌍계사’를 세운 진감 선사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서 생선 장수를 하며 가족을 봉양하는 데 힘쓰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길러 주신 은혜를 오로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니, 이제 도의 뜻을 어찌 마음으로 구하지 않으랴.” 하고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는 비명횡사한 아버지 사도세자가 늘 가슴에 맺혀 있었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장흥 보림사의 보경 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구천을 떠돌 아버지의 넋이라도 위로하고자 수원 화산華山에 천하의 길지가 있다는 말에 그곳에 절을 세우기로 하고 경기 양주에 있는 아버지의 묘를 옮겼다. 그렇게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지금의 융릉)이 조성되었고, 부친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효행 근본 도량’ 용주사가 세워졌다.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친근한 ‘사찰 문화유산’ 해설서

2018년 대한민국의 7개 사찰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한국 불교의 개방성을 대표하면서 승가공동체의 신앙·수행·일상생활의 중심지이자 승원으로서 기능을 유지해 온 점을 높이 산 결과라고 한다. 한국의 산지형 불교 사찰 유형을 대표하는 사찰들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며 불자는 물론 일반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산대찰이다.
그림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어도 미술관을 관람하는 데 어려움이 없듯 우리나라의 산사는 종교와 무관하게 누구나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는 지역 명소이자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휴식 공간이다. 아름다운 풍광과 절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잠시나마 지친 마음을 내려놓기에 손색이 없다. 전국 명산대찰을 방문하는 순례객을 위한 ‘사찰 문화유산’ 해설서가 있다면 이 책 《천년 고찰 이야기》가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사찰 안의 전각, 탑 등 문화재에 얽힌 이야기부터 절 이름에 담긴 창건 의의와 발원의 내용까지 읽다 보면 ‘전설 따라 삼천리’처럼 재미난 옛이야기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정혜결사 발원 도량’ 거조암 영산전의 오백 나한에 얽힌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거조암에서 수행 중이던 도인 스님이 어느 날 가난한 농부의 밭을 지나가다 실수로 조 이삭 3개를 꺾었다. 한 해 동안 피땀 흘린 다른 사람의 노고와 소중한 생명을 망친 것에 대한 미안함에 소로 변한 스님은 그 집으로 들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런 소를 보고 자신이 키우다 잃어버린 소라며 우기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소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3년이 되던 어느 날 소가 주인을 향해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품삯 삼아 떠나기 전에 잔치나 한번 베풀어 달라고 부탁했다. 농부는 흔쾌히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불렀는데, 어느 틈에 소에서 변신한 스님이 소 주인이라며 이 집에 찾아온 이들을 호령했다. 곧 인근의 도적 떼가 앞으로 나왔고, 스님의 추상같은 꾸짖음에 도적들 모두 스님을 따르기로 하고 거조암으로 갔다. 이후 거조암에서 불도를 닦은 도적 떼 모두 성불하여 오백 나한이 되었다고 한다.
나당전쟁 중에 낙산 동쪽 바닷가에서 관음보살 진신을 친견한 의상 대사가 세운 낙산사에는 정취보살상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정취보살은 ‘한눈팔지 않고 꿋꿋이 용맹 정진하는 보살’로 《화엄경》 입법 계품에서 선재동자가 구법 행각을 할 때 29번째로 찾아간 보살이다. 가지산문을 개창한 범일 국사는 중국에서 한쪽 귀가 없는 신라 출신의 어린 스님을 만나 후일을 기약했으나 귀국 후에 까맣게 잊고 지내다 이후 꿈속에 어린 스님이 나타나 항의하자 허겁지겁 찾아 나섰다. 이때 우연히 만난 동네아이에게 인근 다리 밑 물속에 돌로 만든 보살상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범일 국사가 그곳에 찾아가 보살상을 꺼내 보았더니 왼쪽 귀가 떨어져 있는 것이 영락없는 그 어린 스님이었다. 스님이 바로 정취보살이었음을 깨달은 범일 스님은 불전 3칸을 짓고 보살상을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005년 낙산사 화재 때 의상 스님의 관음보살상과 범일 스님의 정취보살상은 화마도 비껴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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