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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 : 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

Neumann, Gerh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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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 : 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 / 게르하르트 노이만 지음 ; 신동화 옮김
개인저자Neumann, Gerhard, 1934-
신동화, 역
발행사항서울 : 에디투스, 2017
형태사항221 p. ; 18 cm
총서명에디투스의 인문 교양 플랜 ;1
주제들 ;2
원서명Verfehlte Anfänge und offenes Ende :Franz Kafkas poetische Anthropologie
ISBN9791196007331
9791196007317 (SET)
일반주기 프란츠 카프카 연보: p. [203]-221
본서는 "Themen. Band 93; Verfehlte Anfänge und offenes Ende/ Franz Kafkas poetische Anthropologie. 2011."의 번역서임
주제명(개인명)Kafka, Franz,1883-1924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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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카프카라는 이름은 어디에나 있다. 비단 문학 안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의 바깥에 이르기까지, 편재해 있다. 그 이름은 문학적 주제를 넘어 어렵고 까다로운 철학서에 등장하는가 하면, 서점과 카페와 레스토랑에서도 마주치는 이미 널리 ‘대중적인’ 이름인 것이다. 아도르노가 그랬던가. 카프카의 작품들은 한편으로 ‘나를 해석해 보라’고 제안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해석을 허락지 않고 문을 쾅 닫아거는 아포리아로 가득 차 있다고. 카프카와 거의 동시대에도, 그는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었다. 병상의 브레히트와 벤야민은 카프카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카프카의 이미지는 대단히 훌륭하다. 그러나 그 밖의 것은 비밀의 잡동사니이다. …… 깊이를 가지고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브레히트) “깊이에 들어가는 것은 정반대의 입장에 들어가기 위한 나의 방식이다.”(벤야민) [물론 브레히트가 카프카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만 했던 건 아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카프카 문학의 정확성이란 어떤 부정확한 것, 즉 꿈꾸는 자의 정확성이다.”] 루카치는 카프카를 놓고 왔다 갔다 했다. 카프카는 “객관적 현실을 세계에 대해 불안에 찬 자신의 견해로 대체”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하등...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카프카라는 이름은 어디에나 있다. 비단 문학 안에서만이 아니라 문학의 바깥에 이르기까지, 편재해 있다. 그 이름은 문학적 주제를 넘어 어렵고 까다로운 철학서에 등장하는가 하면, 서점과 카페와 레스토랑에서도 마주치는 이미 널리 ‘대중적인’ 이름인 것이다. 아도르노가 그랬던가. 카프카의 작품들은 한편으로 ‘나를 해석해 보라’고 제안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해석을 허락지 않고 문을 쾅 닫아거는 아포리아로 가득 차 있다고. 카프카와 거의 동시대에도, 그는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었다. 병상의 브레히트와 벤야민은 카프카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카프카의 이미지는 대단히 훌륭하다. 그러나 그 밖의 것은 비밀의 잡동사니이다. …… 깊이를 가지고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브레히트) “깊이에 들어가는 것은 정반대의 입장에 들어가기 위한 나의 방식이다.”(벤야민) [물론 브레히트가 카프카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만 했던 건 아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카프카 문학의 정확성이란 어떤 부정확한 것, 즉 꿈꾸는 자의 정확성이다.”] 루카치는 카프카를 놓고 왔다 갔다 했다. 카프카는 “객관적 현실을 세계에 대해 불안에 찬 자신의 견해로 대체”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하등 도움이 안 될 문학이라 했다가, 정작 그 자신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드라큘라 백작의 성에 갇히자 “내가 틀렸다. 카프카는 결국 리얼리스트였다”고 했다. 논란은 여전할 테지만, 전후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정은 카프카가 ‘대세’이다. 문학 안에서도, 문학 밖에서도. 모리스 블랑쇼, 들뢰즈와 가타리, 데리다와 아감벤 등등, 이른바 현대 문학과 현대 (정치)철학에서 카프카와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소환되고 있는 것이 그 방증이다.

우리(한국)의 경우도 그런가라는 물음에 이르면, 사정은 좀 다를 것이다. (비평본까지는 아니더라도) 카프카 전집을 포함하여 그의 소설, 편지, 일기 등이 여러 출판사 버전으로 번역 출간되어 있지만, 정작 특정 작품에 대한 말 그대로 ‘작품 해설’ 내지 특정 주제로 접근하는 카프카 연구를 넘어선, 카프카 문학의 ‘전모’로 곧장 파고드는 본격적인(혹은 근원적인) 해석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자학일까. 지금 소개하는 게르하르트 노이만의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 / 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의 첫 장을 펼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온다. “프란츠 카프카가 도대체 무엇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는가?” 다른 말로 하면, 그의 문학이 어째서 현대문학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는가라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카프카 해석의 대가가 아니고서 다짜고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카프카의 텍스트를 ‘실패자의 텍스트’로 읽자는 벤야민의 제안을 이어받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체 여기서의 ‘실패’란 무엇을, 어떤 실패를 의미하는 것일까. 나아가, 이 실패가 어째서 ‘열린 결말(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는)’로 이어진다는 말인가. 또한 그것이 새로운 ‘인류학’의 창조―현대 세계에 대응하는 문학과 정치철학의 수행―를 낳았다는 말인가. 게르하르트 노이만의 카프카 연구가 집약되어 있는 이 작은 책이 이 거창한 물음에 충분히 답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견고한 카프카 문학의 성 안으로 들어가는 믿을 만한 열쇠 하나가 우리에게 선물처럼 다가왔다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신의 언짢은 기분, 기분이 나쁜 날일 따름이야.”

“경계에서 변신이 일어난다.”―게르하르트 노이만의 이 책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에 나오는 구절이다. 카프카가 태어났던 19세기 후반(1883)에서 그가 살았던 20세기 초반은 어떤 시대였을까. 그에 앞서 태어난(1821)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가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전개를 ‘충격(Schock)’을 온몸으로 경험하며 “악의 꽃”을 피워 올렸다면, 고색창연한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에서 창을 통해 불안한 어둠이 그 끝을 삼켜버리는 길을 바라보던 카프카에게 이 세계는 어떤 것이었으며 오로지 문학을 운명으로 알았던 그는 마흔 살의 생을 통해 그 세계와 그 속에서 부침하는 인간적 삶의 운명을 무엇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걸까.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세계에서 찾아낸 근대성의 충격은 다름 아닌 ‘방향 설정의 충격(Orientierungschock)’이었으며, 이 충격은 그 시대를 사는 인간적 삶의 이력을 ‘실패’로 이끄는 것이었다. ‘삐긋하게 어긋나 버리는 삶’―그래서 게르하르트 노이만은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의 시작을 임마누엘 칸트의 “서사적 인류학”으로부터 시작하여, 벤야민의 “자서전적 인류학”을 거쳐 카프카의 좌절하는, 실패하는 인간의 ‘새로운 (시적) 인류학’으로 책의 전반부를 채운다.

모더니티의 눈부신―그러나 몹시 혼란스런―전개 앞에서 게오르크 루카치는 파탄 난 인간적 삶과 영혼의 동경을 담는 글쓰기(“영혼과 형식”)를 시도했고, 벤야민은 지금과는 다른 삶을 긍정하기 위한 잡지 “새로운 천사”를 기획하지만 거듭 실패하기도 하던 그런 시대였다. 칸트의 계몽주의적 낙관은 이미 부서졌고,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1829)로 눈부시게 펼쳐지고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감정교육”에서 진가를 보여준 전통적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기획 역시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 그런 시대였다. 19세기의 끝자락과 20세기의 서두에서 자신의 장대한 ‘교양소설’을 꿈꾸며 시작했던 카프카에게, 그러므로 실패는 예고되어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막스 브로트에 의해 사라짐으로부터 구출되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그의 세 장편소설 『소송』 『실종자』 『성』(노이만은 이 세 편이 거대한 하나의 장편소설의 전개였다고도 말한다)은 그 실패를 증언하듯 모두 미완의 텍스트―실패자의 텍스트―였다. 카프카의 방대한 일기와 편지들이 확인시켜주는 바이지만, 그는 장편소설이 실패하는 지점에 도달할 때마다 ‘단편산문(Kurzprosa)’에 매달렸고, 새로운 비유담의 형식을 구현한 이 단편들(이 역시 벤야민, 그리고 노이만에 따르면 ‘실패’를 형상화한 텍스트인)로 현대 소설의 정점에 당도한다. 마치 보들레르가 유일한 시집 『악의 꽃』 과 산문(시)로 현대시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것처럼, 카프카는, 아니 카프카야말로 이 실패를 실존으로 살아내고 그것을 자신만의 메타 서사 전략을 통해 형상화함으로써 ‘현대성’을 극명히 드러낸 새로운 문학-인류학을 유산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실패한 작가 카프카의 이 역설적인 ‘성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에 앞서 카프카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그보다 더 중요하게는―거듭 실패하기를 중단하지 않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카프카 문학만이 아니라 현대 소설의 가능성 문제를 이해하는 데 관건적인 물음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좀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문학의 가능성인 동시에 현대 세계에 대응하여 인간적 삶의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는 정치-철학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경계에서 변신이 일어난다.”―프라하의 유대인 게토의 경계에서 태어나 평생 빌려 쓴 언어인 독일어로 작품을 쓴 카프카 문학에서 시도된 이 ‘변신(변화)’의 가능성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문학이 갈수록 이 분열이 첨예화되어 가는 세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판단하는 생각은 아픔으로 괴로워했다. 격심한 고통을 더하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마치 완전히 불타 버리는 집에서 마치 건축의 근본 물음을 처음으로 던지는 것과 같다.”


카프카의 작품들은 “완전히 불타 버리는” 세계에서 “건축의 근본 물음을 던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카프카의 장편소설이 실패하고 미완으로 끝났다면, 이 서술 불가능성을 초래한 위기는 무엇이었을까. 한쪽에서는 시작을 가로막고 다른 한쪽에서는 결말을 마무리하지 못하게 하는 위기란. 다르게 말하자면, 삶을 스스로 형성하는 유기체를 삶의 건축물로, 규율화와 법 규정의 구성물로 사회 구조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삶의 사회적 구성의 지지력 상실이라는 위기는 어디에서 초래했으며 카프카는 이에 대해 어떤 서사 전략으로 대처했을까.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의 전반부가 칸트, 벤야민, 니클라스 루만, 데리다 등의 사상을 토대로 인류학(Anthropologie), 이력(Lebenslauf), 경력(Karriere) 같은 개념을 통해 카프카의 실패를 인식론적으로 재구성한다면, 중-후반부는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실종자』 『소송』 「굴」 등 대표작들(실은 거의 전 작품을 횡단해 가면서)을 사례로 삼아 카프카 문학을 관통하는 ‘실패의 형상화’를 깊이 있게 해명한다. 무엇보다 그 동안 장편소설은 그것대로, 단편은 또 그것대로 개별적인 작품 해설에 멈추었던 우리의 시야가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 두 가지―미완의 장편소설들과 단편산문―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가, 그 두 지점 사이를 쉼 없이 오간 카프카의 문학적 분투가 그것들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있는지가 서서히 독자의 머릿속에도 자리 잡는 것 같은 느낌을 맛보게 할 것이다.

처음부터 카프카 비평판의 공동 편자로서의, 그리고 무엇보다 ‘연극성과 문예학’ 연구 그룹을 이끈 비평가로서의 노이만의 역량이 빛나는 대목도 바로 구체적인 작품 해석을 통해서이다. 카프카 문학이 내포하고 있는 ‘연극성’은 실은 브레히트 서사극 이론의 핵심에 있는 게스투스(Gestus)―‘몸짓’ ‘표현’ 등을 뜻하는 제스처(Geste)와는 구분되는―등의 개념 그 너머에까지 도달한 것이었다. 카프카는 근대성이 도래하게 한 충격, ‘벌거벗은 생명’과 ‘주권적 법’ 사이의 심연에 어떻게 대처했던가.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자신에게 강요되는 제도적인 강제 의식에 스스로가 책임지는 자유의 연극과 욕망의 연극으로 응답하며 그러한 강제를 상쇄하려 한다. 바로 이 같은, 방향 설정 전략을 전환하는 과정에서의 이러한 혼란으로부터 놀랍게도 서로 경쟁하는 삶의 감각이 발산되는 것이다. 자유라는 강렬한 삶의 감각과 저항할 수 없는, 강요된 희극성의 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해설’을 대신하는 글로, ‘보론’의 의미로 함께 실은 독문학자 조효원의 글 「벤야민의 카프카―카프카의 실패에 관하여」가 포착해 내고 있는 지점도 바로 이것이다. “흔들림에 철저해지는 것은 법이 지배하는 늪의 세계를 무대로 전환시키는 연기, 즉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이다.” 카프카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의 지배에 대해 ‘완전범죄’로서의 글쓰기를 기획하고 실행했다는 것이다. 법 자체가 완전범죄임을, 혹은 법의 세계가 무대 혹은 연극임을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지 못하게 하는 신화적 폭력이 법 권력과 뿌리를 같이 하고 있음을 통찰하고, 글쓰기―자기 자신을 연기하는―를 통해 법의 문을 닫게 하는, 즉 법 전체를 상대로 하는 완전범죄로서의 글쓰기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아무런 약속도 주어지지 않는” 채 우리에게 남겨진 카프카 문학의 선물인 것이다.


“암, 희망은 충분히, 무한히 많이 있지.―다만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닐 뿐이지.”


노이만의 책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것은 카프카의 새로운 인류학이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 있는 인류학」임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맺고 있다.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인간은 “자전적 동물”이다. 조르조 아감벤에 따르면, 인간은 “인간이기 위해 스스로가 인간적이라 인식해야 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노이만은, 인간은 자기 안의 동물 없이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고, 인간은 내부의 동물을 자기만의 ‘낯선 것’으로, 인간 세계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경험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 경계에서 변신이 일어나고 연출된다. 카프카의 인류학은 이 경계 사이의 차이를 끊임없이 새로 찾아내며 자기를 규정하는 인간을 주목한다. 이것이 카프카가 자신의 위기 시나리오에 동물을 숱하게 등장시키는 이유, 즉 위기 시나리오를 동물 실험으로 구성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카프카 소설의 이 ‘동물적 존재’들―그것은 동시에 카프카가 사랑했던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의조수(하인)와 같이 아무런 성격도 부여받지 못한 인간이기도 하고, 이름조차 얻지 못한 미완성 상태의 존재인 미숙한 피조물이거나 기형(畸形)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 존재들은 또한 동시에, 벤야민의 표현에 따르면, “만약 그 천사들의 날개가 오려붙인 날개가 아니었다면 그 천사들은 어쩌면 진짜 천사들인지도 모르는” 존재들이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 있는 이 존재들은 “어쩌면 일종의 수치감 때문에 인간이라는 형상과 인간의 지혜를 포기”한 존재들이다. 물론 이것은 엄연히 비유, 더 엄밀하게는 비유 이상이다. 근대성의 충격 속에서 진리의 일관성이 사라져버리고 지혜의 붕괴된 잔해만이 남아 있을 뿐인 세계에서 카프카는 진리를 위해 진리 자체를 단념하고 비유를 선택했다. 다시 벤야민의 말처럼, “카프카의 작품들은 처음부터 비유들이다. 그러나 그 작품들이 비유 이상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 그의 문학의 불행이고 그의 문학의 아름다움이다.” 노이만은 벤야민의 이러한 말에서 출발해서 다시 회귀해 카프카의 새로운 인류학을 설명해 낸다. 그 핵심이 이 책을 통해 해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을 말하면, 이 보도자료는 책의 어설픈 스포일러가 될 뿐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사실은 분명하였다(이 역시 벤야민의 말이다). 우선,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서는 누군가 한 사람은 바보가 되어야 한다.” 다음으론, “어떤 바보의 도움만이 진정한 의미의 도움이라는 점”이다. “분명치 않은 것은 다만 그러한 도움이 사람에게도 효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히려 그러한 도움은 어쩌면 (앞서 말한) 천사들에게로 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은 충분히, 무한히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니라는 카프카의 말은 짓궂고 가혹하다. ‘천사들’은 ‘우리’의 도움이 없이도 구원의 문 입구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카프카의 희망은 거기에 있었던 것 같다. 카프카는 문학이라는 무대 위에서 무수한 실패―제자리걸음!―를 거듭함으로써 멸망을 연기(延期)시키고 천사-비존재들이 어느 사이 구원으로 자리 이동하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그토록 실패를 고백하는 연기(演技)를 했던 것은 아닐까. “카프카가 자신의 실패를 강조했던 그 열정보다 더 기억할 만한 것은 없을 걸세……”


‘주제들(THEMEN)’ 시리즈 소개


‘주제들’ 시리즈는 에디투스 출판사의 인문 교양 플랜의 하나로 기획된 것이다. 독일의 유수한 인문학 지원기구인 지멘스 학술재단(Carl Friedrich von Siemens Stiftung)이 오랜 시간에 걸쳐 출간해온 ‘THEMEN’ 시리즈 가운데서 가려 뽑아 한국어로 번역 출간하는 이 시리즈는 ‘석학들의 작은 강연’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으로 비록 책은 작고 얇지만 그 분야의 최고 석학들이 한 가지 주제를 파고들어 하나의 사유-세계를 청중에게 제시하는 것으로 내용에 있어 가히 고급 인문교양의 정수를 제공하는 것들이다. 이 작고 단단한 책들이 던지는 주제가 무엇이든, 척박한 지적 토대를 개선하는 데 기여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Ex Captivitate Salus
감옥 같은 세상을 살아내는 지혜



창세기의 바벨에서 플라톤의 동굴로, 플라톤의 동굴에서 기독교의 지옥으로, 기독교의 지옥에서 베이컨의 우상으로, 베이컨의 우상에서 마침내 주커버그의 페이스북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물려받은 세상은 잔혹한 무지에서 비롯된 집요한 어둠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긴 이름 없는 70인의 현자들이 개시한 번역의 역사는 저 가공할 어둠의 권세에 줄기차게 저항해 왔으며, 지금도 이 역사는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멀고도 느닷없는 시간들 사이에서, 드세고 부질없는 언어들 사이에서, 번역과 번역가들은 모두를 위해 절실한 지혜의 가교를 놓는 일에 몰두하고 헌신한다. 그리하여 번역은 지혜의 모판이 되고, 지혜는 다시 번역(가)의 양식이 된다. ‘주제들(TEMEN)’ 시리즈는 다양하고 웅숭깊은 지혜의 번역을 통해 화려한 첨단의 동굴, 한층 높아진 21세기의 바벨에 갇혀 두목답답한 모든 독자들의 충직한 청지기가 되고자 한다.


1. 장 볼락, 『파울 첼란, 유대화된 독일인 사이에서』, 윤정민 옮김

2. 게르하르트 노이만,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 / 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 신 동화 옮김

3. 데이비드 E. 웰버리, 『현대문학에서 쇼펜하우어가 남긴 것』, 이지연 옮김

4. 세스 베나르데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랑의 변증법』, 문규민 옮김

5. 폴 A. 캔터, 『양심을 지닌 아킬레스: 맥베스와 스코틀랜드의 복음화』, 권오숙 옮김

6. 호르스트 브레데캄프, 『재현과 형식 / 르네상스의 이미지 마법』, 이정민 옮김

7. 데이비드 E. 웰버리, 『괴테의 파우스트 / 비극적 형식에 대한 성찰』, 이강진 옮김


‘주제들’ 시리즈는 계속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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