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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영조 : 18세기 탕평군주상의 재검토

김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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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두 얼굴의 영조: 18세기 탕평군주상의 재검토/ 김백철 지음
개인저자김백철= 金伯哲
발행사항파주: 태학사, 2014
형태사항503 p.: 삽화; 24 cm
총서명태학총서;44
ISBN9788959666539
9788976265005(세트)
서지주기참고문헌(p. 457-484)과 색인수록
주제명(개인명)영조=英祖, 조선 제21대왕, 1694-1776 SLSH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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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전율(戰慄)의 군주와 요순(堯舜)의 현신(現身) 사이, 황혼의 탕평군주 영조의 맨얼굴을 마주 보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생활한다. 혹자의 지적처럼 우리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공민(公民) 종교로 떠받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근대 민주공화정의 틀에 완전히 적응하였다고 믿는 데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정치 상황은 언제나 전통시대의 관점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왕정의 군주를 바라보는 듯한 모순된 시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정치인 대통령과 왕정의 군주상이 교차되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조선의 역사는 현재와 연동되어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전통시대는 왕정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현대는 민주공화정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리적이다. 어느 한쪽을 비판하거나 미화하기 위해 수백 년의 시간적 간극을 무시한 채,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과 정치 체제를 동일시하는 것은 실상과 괴리된 역사 인식에 불과하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가감 없이 탕평군주상의 변화 과정에 접근하였다.

전율(戰慄)의 군주

1부에서는 살얼음을 걷는 심정으로 평화의 ...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전율(戰慄)의 군주와 요순(堯舜)의 현신(現身) 사이, 황혼의 탕평군주 영조의 맨얼굴을 마주 보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생활한다. 혹자의 지적처럼 우리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일종의 공민(公民) 종교로 떠받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근대 민주공화정의 틀에 완전히 적응하였다고 믿는 데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정치 상황은 언제나 전통시대의 관점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왕정의 군주를 바라보는 듯한 모순된 시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정치인 대통령과 왕정의 군주상이 교차되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조선의 역사는 현재와 연동되어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전통시대는 왕정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현대는 민주공화정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합리적이다. 어느 한쪽을 비판하거나 미화하기 위해 수백 년의 시간적 간극을 무시한 채,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과 정치 체제를 동일시하는 것은 실상과 괴리된 역사 인식에 불과하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가감 없이 탕평군주상의 변화 과정에 접근하였다.

전율(戰慄)의 군주

1부에서는 살얼음을 걷는 심정으로 평화의 시대를 이룩한 영조의 집권 후반기에 새롭게 변모한 탕평정치의 성격을 살핀다. 여기서는 서양 절대군주나 동양 전제군주와는 다른 층위의 개념으로 탕평군주를 조망하기 위해서 ‘전율’로 표현했다.
‘탕평’은 난국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신료들은 언제 충역이 엇갈릴지 모르는 불안한 정국에서 벗어나 실력 본위의 출사를 희망할 수 있었고, 군주 역시 붕당의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각 붕당을 뛰어넘는 초월자로 자신의 위상을 설정할 수 있었다.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당론은 불식되었고, 국가의 문물제도 경장 사업에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국왕은 노론 대 소론의 당론(黨論)을 뛰어넘는, 군주 주도의 탕평이라는 새로운 정치 이념 속에서 정국이 운영되고 있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잠복해 있던 붕당 간의 의리 논쟁이 재현되었고, 영조 31년(1755) 을해옥사로 영조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소론과 노론에서 각각 70여 명이 반성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소론 준론(峻論)에 대한 토역(討逆)이 탕평의 상징인 ‘건극(建極)’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국왕은 ‘전제화된 권력’을 행사하여 난국을 무당(無黨)의 시대로 전환하는 데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신료들의 반대로 실현시키지 못했던 공노비의 대대적인 신공(身貢) 감면도 뜻을 이루었다.
전통적인 노론이나 소론의 당론이 무력화되자, 각 붕당에서 청류淸流를 자임하는 인사와 훈척(勳戚) 출신이 정국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양대 세력은 국왕으로부터 붕당의 출현으로까지 지목받을 정도였다. 영조 48년(1772) 국왕은 인사 문제를 기화로 10년 이상 지근에서 보필한 고굉지신(股肱之臣) 김치인을 처벌하였다. 이것은 소론에 대한 강력한 숙청으로 노론을 억눌렀던 을해옥사, 그리고 왕세자조차 처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 신료들을 전율토록 한 임오화변과 맞닿아 있다. 상당히 돌발적인 사건이었는데도 영조는 이것이 ‘대탕평(大蕩平)’의 일환이었다고 강변하면서, ‘초월적 권위’를 행사하여 지난 20여 년간 좌절되었던 소론 대신의 복권도 일거에 달성하고 마침내 오랜 숙원이던 서얼의 청요직 허통도 실현시켰다.

요순(堯舜)의 현신(現身)

2부에서는 새롭게 확보한 군주의 위상이 어떠한 방식으로 백성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살핀다.
영조는 왕실의 전통 요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선왕대까지는 대신에게 질의하는 정도에 불과하던 순문(詢問)을 하급 관리부터 시골의 농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대상에게 무차별적으로 질의하는 형태로 바꾸었다. 임금은 거의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주제와 참여 계층을 대상으로 순문을 열었다. 농사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농민을 소견하였을 뿐 아니라, 공인貢人과 시인市人 같은 이들에게도 순문을 행하여 화폐 경제의 변화를 몸소 국정에 반영하였다.
영조는 언론을 장악하여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였고, 무엇보다 자신의 신변과 국정 철학을 스스로 밝히고 싶어 하였다. 이를 국정을 직접적으로 장악하는 수단 중 하나로 간주하였다. 강력한 탕평군주를 실현시키는 데 언론 매체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재위 중반 윤음(綸音)으로 표현되었다.
국왕은 순문과 윤음을 통해 신민에게 어질고 자상한 요순으로 온전히 각인되었고, 백성은 시혜 대상에서 점차 임금에게 필요한 존재로 변모하였다. 그러므로 군민 관계 재설정은 한 방향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호 간의 작용으로 심화되었다. 18세기 백성관은 점차 ‘애민(愛民)’에서 ‘군민상의(君民相依)’로 변화하였다.

탕평군주상 창출과 재평가

제3부에서는 탕평군주상의 형성 과정을 추적하였다.
탕평군주의 위상은 당대에 존호(尊號)라는 형식으로 평가가 시도되었으며, 사후에는 묘호(廟號)와 시호(諡號) 제정과 개정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묘호인 ‘영조(英祖)’는 사실 고종 연간 추존 사업의 결과로 만들어진, 최근 1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산물이다. 여기에는 조선초기의 강력한 왕권을 꿈꾼 18세기 탕평군주를 재발굴하여, 세도정치기에 위축된 왕실의 권위를 반석 위에 세우는 고종대의 정치 분위기가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고종 초반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영조를 가장 이상적인 조선의 군주로 평가하였다. 영조 연간에 세종을 바라보듯이, 고종대에는 영조를 바라보았다. 영조를 직접 추존한 시기는 고종이 야심차게 시행한 근대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갑신정변과 임오군란 등의 변란을 몇 차례 겪은 뒤였다. 절치부심한 고종은 새로운 개혁의 전형을 발굴하였다. 영조는 그 첫 주자로 이 시기에 재평가되었다. 이것은 향후 대한제국기 정조를 필두로 한 일군의 군왕에 대한 황제 추존의 서막이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화려한 정조시대의 서막을 알리다

결과적으로 황혼을 맞이한 영조는 신료에게 엄격한 전율의 군주로 군림하면서도, 동시에 백성에게 자애로운 요순의 현신으로 재림하였다. 그는 즉위 후 30여 년간 오랜 인내와 타협으로 신민을 심복(心服)시켜서 대경장(大更張)을 실현시켰고, 향후 20여 년간 전제화된 권력과 초월적인 권위까지 거머쥐고 이른바 무당(無黨)의 시대를 열었다.
황혼의 탕평군주는 고양된 자신의 위상을 요순정치를 실현하는 데 쏟아부었다.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에서 국왕이 주창한 요순의 도道는 공公과 사私의 명백한 변별을 전제로 하였다. 이것만이 자신이 황형(皇兄, 경종)으로부터 막중한 왕위를 계승한 의무를 다하는 길로 간주하였다. 이른바 극한의 국가주의자의 면모는 황형의 은혜에 대한 책임감의 발로였다. 태종의 선택이 찬란한 세종시대를 열었듯이, 영조의 결정도 화려한 정조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영조의 두 얼굴은 새로운 조선의 탄생

18세기 탕평군주는 사족, 서얼, 중인, 농민, 공인(貢人), 시인(市人), 천인 등을 모두 국가에서 배려해야 할 ‘광의(廣義)의 백성’으로 재설정하고, 왕정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여 사회 변동기를 지혜롭게 대처하였다. 이 같은 정치의식은 급기야 ‘민국(民國)’ 개념의 성장과 맞닿아 있다. 당시 대경장의 명분은 민국이었으며, 국왕 자신은 한평생 민국에 몸과 마음을 바쳐 왔다고 술회하였다. 다음 세대를 살아간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영조를 전설적인 성군으로 바라보았고, 이러한 신화는 약 1백여 년 뒤 고종시대에도 전해져 개혁군주의 전형으로 재평가받았다.
따라서 탕평군주에 대해 단지 권력을 전제하여 붕당을 일시적으로 억눌렀을 뿐 근본적인 개혁에는 실패했다는 평가는 사실과 다르다. 왕정 체제에서는 국왕이 권력을 장악해야 정국 운영이 반석 위에 설 수 있으며, 이것을 토대로 일관된 경장의 추진도 가능하였다. 이때 개혁한 국가의 경제 체계는 조선을 향후 1백 년간 존속시키는 힘이 되었다. 영조가 보여 준 두 가지의 얼굴은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조선의 탄생을 의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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