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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오례와 왕권

채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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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신라의 오례와 왕권/ 채미하 지음
개인저자채미하= 蔡美夏, 1967-
발행사항서울: 혜안, 2015
형태사항343 p.: 삽화; 24 cm
ISBN9788984945333
서지주기참고문헌(p. 329-339)과 색인수록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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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왕권 강화의 명분인 오례(五禮)가 고대 신라에서 운용되었음을 밝힌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에서 예(禮)는 오례(五禮), 길·빈·군·가·흉례(吉·賓·軍·嘉·凶禮)로 대표된다. 여태껏 한국사에서 오례에 의해 왕권의 수립과 운영이 가능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부터였고, 그 절정은 조선시대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미 한국 고대사에서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곧 저자는 진덕왕대를 전후한 시기에 신라에 수용된 오례가 신문왕 6년(686)에 당에서 보낸 길흉요례(吉凶要禮)를 통해 체계화되었고 그것이 신라에 운용되었다고 본다. 이어 신라에서 오례가 지니고 있는 정치·사회적 의미 및 그 의례공간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왕자(王者)에게 정치적 권위를 수식하고 정치권력의 명분을 제공한 오례가 한국 고대에 구축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구체적으로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제1장에서는 신문왕 6년 당에서 보낸 길흉요례에 대한 검토를 통해 신라에 수용된 오례의 내용과 그와 관련된 관부 등을 살펴보았다. 신라에 오례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통일전 진덕왕대를 전후한 시기였고, 김춘추가 당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오례...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왕권 강화의 명분인 오례(五禮)가 고대 신라에서 운용되었음을 밝힌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에서 예(禮)는 오례(五禮), 길·빈·군·가·흉례(吉·賓·軍·嘉·凶禮)로 대표된다. 여태껏 한국사에서 오례에 의해 왕권의 수립과 운영이 가능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부터였고, 그 절정은 조선시대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미 한국 고대사에서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곧 저자는 진덕왕대를 전후한 시기에 신라에 수용된 오례가 신문왕 6년(686)에 당에서 보낸 길흉요례(吉凶要禮)를 통해 체계화되었고 그것이 신라에 운용되었다고 본다. 이어 신라에서 오례가 지니고 있는 정치·사회적 의미 및 그 의례공간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를 통해 왕자(王者)에게 정치적 권위를 수식하고 정치권력의 명분을 제공한 오례가 한국 고대에 구축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구체적으로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제1장에서는 신문왕 6년 당에서 보낸 길흉요례에 대한 검토를 통해 신라에 수용된 오례의 내용과 그와 관련된 관부 등을 살펴보았다. 신라에 오례가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통일전 진덕왕대를 전후한 시기였고, 김춘추가 당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오례가 신라에 수용되었다. 길흉요례를 통해 체계화된 오례에는 국가제도 전반인 길례에서 흉례에 이르는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신라에 오례가 운용되었다는 예로는 신문왕대 오묘제가 시정되었고 이후 예제상의 관행에 따라 오묘의 신위가 개편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또 국학이 왕권의례에 대한 이론을 담당하였으며 전사서를 비롯한 예부의 부속관서와 영객부 및 내성의 의례 관부들이 오례와 관련된 의례가 행해질 때 여러 일을 담당하였던 데서도 확인된다.
제2장에서는 신라에 오례가 운용되었고 이것이 신라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길례를 대표하는 것은 국가제사로, 여기서는 지금까지 주목하지 않았던 신라 국왕의 시학(視學)을 통한 석전례(釋奠禮)를 검토하였다. 신라는 신문왕 2년(682)에 국학이 정비된 이후 석전례가 수용되었으며, 성덕왕 16년(717)에는 석전례가 정비되었다. 석전례의 절차 중 하나인 시학은 신라 국왕이 국학에 행차하여 오경(五經) 등에 대한 강의 또는 강론을 듣고 그것이 끝난 후 참석자들에게 물건을 내려주었다는 의식이다. 이 시학은 국학생 뿐만 아니라 도당 유학생들도 관료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기도 하였다.
빈례(賓禮)는 다른 예와는 달리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 내용은 대부분 전왕(前王)에 대한 조제(弔祭)와 신왕(新王)에 대한 책봉(冊封)과 관련된 의식이었다. 신라의 빈례는 김춘추가 입당하여 경험한 빈례의 내용과 길흉요례 등을 통해 변화되었는데, 이것은 빈례를 담당하는 영객부의 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책봉은 신라에 온 당의 책명사를 왕이 접견하는 의식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때 당 사신은 황제의 책봉 조서, 관고(官誥)와 정절(旌節), 예물 등을 신라 왕에게 바쳤다. 이 같은 빈례는 대외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신라의 내부 질서를 유지하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신라 사회는 중국 제도의 영향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이 중 군사와 관련된 의례인 군례(軍禮)도 마찬가지였다. 진평왕대 이후 그 전과는 다른 포상정책, 당 육진병법의 수용, 개선의례의 하나인 선조묘(先朝廟)에 대한 제사는 당 군사의례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통일 이후 신라의 대열과 ‘관사’의식, 순행은 「개원례」의 황제강무(皇帝講武), 황제관사우사궁(皇帝觀射于射宮), 정순(征巡)과 비교된다. 특히 헌강왕은 다양한 군사의례를 통해 즉위를 전후하여 있었던 어려움을 타개하고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하였다. 이 중 의례의 마지막을 장식한 렵(獵)은 실전 군사훈련으로, 렵에서 잡은 짐승은 종묘에 바쳤으며 헌강왕은 렵을 통해서 인재를 등용하기도 하였다.
가례(嘉禮)는 다른 4례와는 달리 만민이 행하는 것으로, 오례 중 유일하게 상·하가 함께 할 수 있는 의례였다. 신라에 가례가 수용된 것은 진덕왕 5년(551)에 시작된 하정례에서 볼 수 있으며, 이는 당시 귀족회의체의 변화와도 관련 있었다. 정월 초하루의 하정례는 8월 15일의 조하례와 함께 신라의 대조회였으며, 일반 조례도 있었다. 또한 책명을 받은 왕실 구성원인 왕후와 태자는 왕과 마찬가지로 군신들에게 조하례를 받았다. 신라 가례를 대표하는 것은 혼례로, 신문왕의 혼인 절차는 당 황제가 황후를 맞는 의례와 비교된다.
흉례(凶禮)는 조상(弔喪)이나 기근, 재해 등에 대한 구휼을 뜻한다. 길흉요례가 수용되기 이전 한국 고대사회에는 중국 상례의 영향을 받은 상복제 등이 있었는데, 이것이 길흉요례의 수용으로 보다 체계화되었다. 상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왕의 상례인 국휼(國恤)로, 국휼의 절차는 상(殯)—장(산릉조성)—제(祔廟)의 과정을 거쳤으며 국휼 기간 중에 신왕이 즉위하였다. 신라 문무왕은 구전즉위를 유조로 남겼는데,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조에 따라 1차 즉위인 구전즉위를 하였고 문무왕의 빈(殯)을 행한 이후 2차 즉위를 하였다. 이것은 이후 의례화되었으며 신왕은 즉위 이후 즉위년이나 2~3년에 ‘친사시조묘(신궁)’를 비롯하여 대사(大赦) 등 다양한 통치의례를 행하였다. 신왕의 즉위와 관련된 통치의례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친사시조묘(신궁) 내지는 부묘로, 이것은 국휼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3장에서는 오례가 지니고 있는 정치·사회적 의미를 흥덕왕대의 정치와 의례 및 한국 고대의 상·제례를 통해 파악하였다. 흥덕왕은 왕 9년(834)에 색복·거기·기용·옥사에 대하여 진골을 비롯한 사회 전 계층에게 사치를 금지하는 교를 내렸는데, 이것은 당시 골품제와 지방인의 동요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신분제를 정비한 것이었다. 게다가 흥덕왕은 군사의례를 포함한 신궁‧시조묘 제사 등의 다양한 의례를 통해서도 국가의 총체적인 위기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로 볼 때 흥덕왕 9년의 교와 의례는 율령과 의례에 의한 정치가 신라에서 운용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라고 하였다. 한편 한국 고대의 계세적(繼世的) 내세관은 불교와 유교의 영향으로 변하였으며 기왕의 후장 등은 박장 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교의 상복제와 빈, 실질적인 시조와 직계조상을 모시는 제사제도가 한국 고대에 운용되었으며 귀족들도 가묘제를 두어 직계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제4장에서는 왕궁의 의례 공간과 신왕의 통치공간에 대해 살펴보았다. 신라 문무왕은 <주례>의 궁궐 원칙을 따라 양궁과 동궁을 새로 만들고 월성도 수리하였으며, 신라 정전인 조원전은 당 태극궁의 태극전과 비교될 수 있다. 이러한 신라 왕궁에서는 하정례, 외국 사신 접견, 연회 등 다양한 의례가 행해졌으며 왕궁의 공간을 구획하는 문 역시 의례 공간으로 그 역할을 하였다. 선왕의 빈이 행해진 공간인 빈전은 왕궁 안에 있었으며, 신왕이 즉위한 장소는 정전 내지는 정침(내전)이었고 신왕의 다양한 통치의례 공간은 대체로 외조(外朝)였다. 왕궁 밖의 통치 의례공간으로는 국가제사의 여러 제장과 군례의 열병·순수·렵이 행해진 장소 등이 꼽힌다.
제5장에서는 신라에 수용되고 운용된 오례의 성격과 그 의미를 살펴보았다. 신라 신문왕이 당에 <예기>와 문장을 요청한 것은 새로운 국가질서의 정비와 더불어 중대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에서 보낸 길흉요례는 왕권을 수식하는 의례로, 신라 중대 이후 왕에게 최고의 권위를 향유토록 하였다. 이는 「개원례」 152개의 의례 중 78개가 황제의례로 황실의 권위를 세우고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서 알 수 있다. 당이 신라에 보낸 오례의 내용은 당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속에 신라를 편제하려고 했던 당의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신라의 구체적 상황에 따라 오례의 내용은 변용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고려·조선을 거쳐 변화·발전되어 갔다. 이상에서 신라에 수용되고 운용된 오례는 한국 고대에 왕자(王者)에게 정치적 권위를 수식하고 정치권력의 명분을 제공하면서 한국 고대사상에서 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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