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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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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 / 이광수 지음
개인저자이광수
발행사항서울 : 푸른역사, 2017
형태사항211 p. : 삽화 ; 22 cm
ISBN9791156120858
서지주기참고문헌(p. 202-207)과 색인수록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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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허왕후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인도에서 온 존재로 날조되었는가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허왕후 신화, 왜 그리고 어떻게?

신화의 정치학

흔히 ‘역사는 다시 쓸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의 모든 일이 대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일이 역사로 기술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술되는 역사의 자리에는 기술하는 이의 관심과 가치 판단에 의해 취사선택된 ‘역사’만 들어선다. 역사를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나 인물의 기록’이라는 사전적 의미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신화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이야기 중 일부만 선택되어 역사 기록에 담긴다. 특히 한 나라를 건국한 영웅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화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화는 신화를 만들어낸 이들이 필요로 하는 시기에, 필요로 하는 내용으로 강조된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나 어떤 왕조의 통치권이 비로소 반석 위에 오를 때면 건국 시조의 후손들은 건국의 영웅을 신화로 윤색하여 찬양한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단군왕검 신화를 만들어 내부의 에너지를 모으...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허왕후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인도에서 온 존재로 날조되었는가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허왕후 신화, 왜 그리고 어떻게?

신화의 정치학

흔히 ‘역사는 다시 쓸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의 모든 일이 대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일이 역사로 기술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술되는 역사의 자리에는 기술하는 이의 관심과 가치 판단에 의해 취사선택된 ‘역사’만 들어선다. 역사를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나 인물의 기록’이라는 사전적 의미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신화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사건과 인물에 대한 이야기 중 일부만 선택되어 역사 기록에 담긴다. 특히 한 나라를 건국한 영웅에 대해서는 다양한 신화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화는 신화를 만들어낸 이들이 필요로 하는 시기에, 필요로 하는 내용으로 강조된다.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나 어떤 왕조의 통치권이 비로소 반석 위에 오를 때면 건국 시조의 후손들은 건국의 영웅을 신화로 윤색하여 찬양한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단군왕검 신화를 만들어 내부의 에너지를 모으려 한 것이나 조선 세종 대에 고려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태조 이성계의 신화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는 이름으로 찬양한 것은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허왕후 신화의 탄생과 확장

허왕후 신화 또한 이 같은 경향이 강하다. 허왕후는 아유타국阿踰?國 출신 공주다. 16세의 나이에 많은 수행원들과 함께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 김수로왕에게 시집을 가 왕비가 되었고, 태자 거등공을 낳았다. 157세까지 살았는데 죽은 후 구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했다. 여기까지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몇 가지 전설이 붙었다. 허왕후가 심한 풍랑을 만나 더 이상 항해하기 어렵게 되자 아유타국으로 되돌아가 ‘파사석탑’이라는 것을 배에 실었고 그런 후에야 무사히 김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의 〈금관성 파사석탑〉조에 새로 실린다.
여기에 허왕후가 오빠인 장유화상과 함께 왔는데, 그 장유화상이 불교를 들여왔다는 이야기가 새롭게 추가된다. 또 허왕후가 아들 열 명을 낳았는데 첫째는 수로왕의 뒤를 이어 가야의 왕이 되었고, 둘은 허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은 산으로 들어가 신선 혹은 붓다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만들어진다. 최근에는 딸도 둘을 낳았는데, 그 두 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국을 세웠다는 이야기까지 덧붙여진다.

왜 허왕후 신화만 사실로 받아들여지는가

현재 김해시는 허왕후가 인도에서 시집왔다는 신화를 실체화하여 여러 가지 행사를 열면서 시 관광 진흥의 소재로 삼고 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는 허왕후의 도래 이야기가 개막식에서 화려한 행사로 올려지기까지 했다. 신화를 문화 행사의 일환으로 활용하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이상하게도 유독 허왕후 이야기는 실재의 사실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허왕후 신화를 사실로서의 역사로 간주하는 경향은 가야를 한국 고대국가 가운데 유독 신비한 이미지로 덧칠한다.
왜 그럴까?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슬픈 붓다》, 《역사는 핵무기보다 무섭다》 등의 저작을 통해 역사의 국가주의화와 사이비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고찰해온 저자 이광수(부산외국어대 인도학부 교수)는 이 책에서 왜 유독 허왕후 신화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는지, 허왕후 신화가 처음 만들어진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증식하고 확장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해 역사적으로 분석한다. 나아가 이 같은 분석을 토대로 역사학과 사이비 역사학의 문제, 사이비 역사학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것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문제까지 날카롭게 지적한다.


허왕후 신화, 신화에서 역사로

허왕후 신화는 어떻게 확장되었는가

허왕후 신화는 한날한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처음 뼈대가 만들어졌을 때로부터 새로운 살이 붙은 가장 최근까지의 기간은 1000년이 훨씬 넘는다.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은 이삼백년 전에 날조된 것이고 이는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허왕후 신화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의 구조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당대 특정 구성원의 바람과 필요가 추가되어 많은 이야기들이 새로 만들어지고 확장되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허왕후 신화에는 삼국시대에 만들어져 그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담은 부분도 있고, 조선시대에 당대의 시대상을 담아 덧붙여진 것도 있으며, 1970년대 이후에 당시의 시대상을 담아 추가된 것도 있다.
허왕후 신화가 확장되는 과정을 보면 항상 특정 집단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체는 때로는 왕족이기도 하고 때로는 가문이기도 하고 때로는 불교 사찰이기도 하고 때로는 사이비 역사학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허왕후 신화는 어떻게 확장되어왔는가?

파사석탑과 장유화상, 허왕후 신화의 역사화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조에 의하면 허왕후는 처음 고향을 출발했다가 풍랑을 만나 더 이상 가지 못하자 다시 돌아와 파사석탑을 가지고 탔고 그 덕분에 가락국에 잘 도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는 100퍼센트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고대 인도에는 탑을 배에 탑재한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인도의 항해술을 고려해볼 때 돌무더기를 가지고 풍랑을 막아내면서 그 먼 인도 아요디야에서 가락국까지 항해해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김해에 있는 현재 허왕후릉이라고 알려져 있는 능 바로 앞에는 파사석탑이 자리해 있다. 원래는 호계사에 있던 것을 고종 때 김해부사 정현석이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신화가 사실로서의 역사로 변해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허왕후 신화는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허왕후가 본격적으로 역사적 실존 인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조선에서 상당히 지체 높은 가문으로 자리 잡은 양천허씨다. 경상도 관찰사였던 허엽(1517~1580)과 또 다른 양천허씨 관찰사인 허적(1610~1680)은 수로왕릉을 크게 보수한다. 허왕후를 전설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 역사적 인물로 보고 수로를 치켜세움으로써 허왕후의 역사성도 부각하려 한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을 통해 허왕후는 적극적으로 역사화된다.
이러한 양천허씨 문중의 조상 만들기에 사찰도 가세한다. 흥국사로 이름이 바뀐 옛 김해 명월사에서 ‘장유화상長遊和尙’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고 김해의 장유사長遊寺에서 이를 다듬어 장유화상이 허왕후의 오빠 허보옥許寶玉이며 그가 불교를 직접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찰의 연기 설화를 고증하기 위해 중수 과정에서 오래된 기와가 나왔다는 비기秘記 의존 방식을 사용한 창작이다. 이처럼 양천허씨 문중의 조상 현창 사업에 사찰의 연기 설화 창조와 만나면서 허왕후는 점차 실제 역사인물로 발전한다.

학계, 허왕후 신화의 역사화에 일조하다

허왕후 전설은 1970년대 이전에는 아무도 크게 주목하지 않는, 《삼국유사》에 등장한 전설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이종기라는 한 아동문학가가 쓴 탐사문 형식의 소설 《가락국탐사》(1977)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종기는 《가락국탐사》를 통해 허왕후가 실제로 북인도의 아요디야에서 서기 20년경에 출발해 몇 년 후인 기원 초에 태국의 아윳티야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 후 48년 음력 5월에 김해에 왔다고 주장했다.
이종기의 이 같은 주장은 학계와 언론을 통해 확장된다. 김병모는 아요디야를 세운 허왕후 가문이 전란으로 인해 중국 내륙의 보주普州로 이동했다가 그곳에서 가야로 건너왔다고 말하면서 보주는 중국 사천성 안악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재야사학자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이화는 허왕후가 가지고 온 파사석탑이 ‘중국의 남쪽 지방과 인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돌이라는 사실이 근래에 확인되었다’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 진술을 한다. 이덕일도 《삼국유사》에 나오는 설화만을 근거로 허왕후를 수로와 함께 금관가야국의 공동 시조로 치켜세운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인도사에서는 역사적 추론조차도 되기 어려운 수준임에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근거를 내세우며 허왕후를 실존 인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허왕후 신화의 역사화, 무엇이 문제인가?

창작 신화가 실제의 역사로

허왕후 신화는 통일신라시대에 수로왕 신화의 일부로서 뼈대가 만들어진 이후 〈가락국기〉 안에 수록되고 여러 이야기들이 덧붙여졌다. 《삼국유사》가 편찬되는 고려 문종 대에 이르러서는 신화의 구조를 갖추었다. 그 후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허왕후는 실제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당시 성리학적 세계관 위에서 가문을 중심으로 정치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신도들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궁리를 하던 불교 사원 사람들이 그 중심에 섰다.
나말여초 이야기를 창작하던 중 만들어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능을 갖추고 시호를 받은 실제의 인물로 날조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학자와 언론의 적극적 언급이 더해지면서 허왕후 창작 신화는 실제의 역사로 자리 잡는다.

학계 주장의 문제점

그러나 허왕후 신화를 실제 역사로 보는 학자들의 언술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엿보인다. 먼저 이종기의 주장을 보면, 인도 북부 한가운데에서 강을 타고 떠난 사람들이 어떻게 태국에 도착하여 식민지를 건설했는지, 그 식민지를 두고 또 왜 가락국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왜 언제 허왕후 가문이 아요디야를 떠났고, 어떻게 태국의 아윳티야를 식민지로 건설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식민지를 건설한 후 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떠나게 됐는지에 대해 단 한 줄의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다.
허왕후의 결혼을 외래 세력의 정치적 핍박을 피해 피난한 것으로 이론화하려는 김병모의 주장도 당대 인도 역사를 살펴보면 납득하기 어렵다. 고대 인도는 지역 군주들의 권력을 인정해주거나 느슨한 봉건제의 형태를 유지했다. 따라서 외래세력이 정부를 전복시키고 왕족들을 끌고 가거나 그들이 유민으로 도망가는 사례는 이 지역 역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허왕후(혹은 허왕후의 선조)가 택한 중국으로의 피난로도 고대에는 그 사이에 길이 없었고, 그 길을 통해 중국과 인도를 왕래한 사람도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이이화와 이덕일 또한 역사학의 제1원칙인 사료 검증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후대에 만들어진 자료를 가지고 당시의 역사를 운운한다는 점에서 매우 무책임하다.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불교의 여러 설화들을 사실로서의 역사를 보여주는 근거로 삼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허왕후 신화의 역사화를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 이유

신화는 당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바람을 자신들의 방식대로 해석해놓은 것들이다. 신화를 통해 당대 사람들의 의식의 역사를 추출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신화가 역사적 실체를 가지게 될 때 그것은 역사를 특정 방향으로 추동해나가는 힘을 확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왜곡된 역사가 무서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나치의 아리야인 신화가 좋은 예다. 역사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아리야인 신화로 인해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몰살당했는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이 같은 우려는 인도의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 문제를 놓고 봤을 때 단순한 우려만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2002년 북부 인도의 웃따르쁘라데시 주에 있는 아요디야 시 사리유 강가에는 가락중앙종친회에 의해 검은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진 허왕후 탄생 기념비가 세워진다. 이 허왕후 탄생비가 아요디야의 사리유 강가에 건립한 배경에는 인도의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의 적극적 후원이 있었다. 인도국민당은 힌두 민족주의 중심의 극우 파쇼적 정치를 표방하는 정당으로 정치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아요디야에 두고 있다. 인도국민당과 그 방계 세력들은 1992년 12월 아요디야에서 라마 사원을 복원한다면서 기존의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고 232명의 인명 살상을 초래했다. 그 후로도 폭력은 계속되어 500명 이상이 살해되고 수십만 명이 가정을 잃었으며 천문학적인 재산 손실도 가져왔다.
이러한 양상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들은 외국인을 매우 혐오하는데, 특히 이슬람과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심하다. 그들 중 심한 수구 파시스트들은 수녀 강간, 기독교인 살해, 무슬림 학살의 배후 세력이라는 의심까지 받고있다. 이 같은 인도의 극우 패권주의 세력들에게 한국의 ‘아요디야에서 온 공주 허왕후’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정권 정당성의 근거가 될 가능성이 있다.
허왕후 신화는 민족주의와 국민 콤플렉스가 존재하는 한, 역사학자들이 자신의 연구 분야 외에 관심을 쏟지 않거나 남이 한 연구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하면서 의심의 눈초리와 비판력을 상실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 살아서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통제 불가능한 괴물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왕후 신화의 역사화에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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