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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라는 유산 : 영조와 조선의 성인군주론

Haboush, JaHyu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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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단행본
서명/저자사항왕이라는 유산 : 영조와 조선의 성인군주론 / 김자현 지음 ; 김백철, 김기연 옮김
개인저자Haboush, JaHyun Kim
김백철= 金伯哲, 역
김기연= 金己鉛, 역
발행사항서울 : 너머북스, 2017
형태사항448 p. : 삽화 ; 22 cm
원서명Confucian kingship in Korea :Yŏngjo and the politics of sagacity
ISBN9788994606484
일반주기 본서는 "The confucian kingship in Korea : Yŏngjo and the politics of sagacity. c2001."의 번역서임
서지주기참고문헌(p. 410-425)과 색인수록
주제명(개인명)영조=英祖, 조선 제21대왕, 1694-1776 SLSH
주제명(지명)Korea --Politics and government --1392-1910
Korea --Kings and rulers
일반주제명Confucianism and state --Korea
언어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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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부

"도덕적 군주상의 수사가 대안이었다"

이 책은 영조가 유교적 군주상을 이해하고 체현한 과정을 연구한 내용을 담았다. 곧, 18세기 한국사에서 군주상과 국왕, 관료와 백성 사이의 복합성과 변화상을 보여주는 심성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신유학의 군주상은 평범한 사람도 수신을 하면 최고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성인군주의 이상에 기초한다. 영조는 신유학의 성군상에 가장 매혹적인 본보기였으며,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국왕이었다. 이 책에서 김자현 교수(컬럼비아대)는 요순정치론, 탕평정치, 균역법, 사도세자 등 영조와 그 시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탁월하게 안내해줄 뿐 아니라 유교적 수사와 조선시대 정치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아울러 영조와 유일한 아들 사도세자의 관계 악화에 초점을 맞추고, 유교적 군주가 아들을 구할지 왕조를 구할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고뇌와 결부해서 설명한다.
종합적으로 저자는 조선의 국왕이 도덕적 군주상으로 인해 제약을 받았지만 왕이 단지 군주상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다양성을 구축했다는 점을 들어 '상호작용적인 군주상'이란 개념을 제안한다. ...

출판사 제공 책소개 전체

"도덕적 군주상의 수사가 대안이었다"

이 책은 영조가 유교적 군주상을 이해하고 체현한 과정을 연구한 내용을 담았다. 곧, 18세기 한국사에서 군주상과 국왕, 관료와 백성 사이의 복합성과 변화상을 보여주는 심성을 연구한 결과물이다. 신유학의 군주상은 평범한 사람도 수신을 하면 최고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성인군주의 이상에 기초한다. 영조는 신유학의 성군상에 가장 매혹적인 본보기였으며,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국왕이었다. 이 책에서 김자현 교수(컬럼비아대)는 요순정치론, 탕평정치, 균역법, 사도세자 등 영조와 그 시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탁월하게 안내해줄 뿐 아니라 유교적 수사와 조선시대 정치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아울러 영조와 유일한 아들 사도세자의 관계 악화에 초점을 맞추고, 유교적 군주가 아들을 구할지 왕조를 구할지를 선택해야만 하는 고뇌와 결부해서 설명한다.
종합적으로 저자는 조선의 국왕이 도덕적 군주상으로 인해 제약을 받았지만 왕이 단지 군주상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다양성을 구축했다는 점을 들어 '상호작용적인 군주상'이란 개념을 제안한다. 군주상 역시 왕좌를 차지한 사람에 따라 변화했다는 것이다.
영조 치세 중 가장 유명한 주제이자 영조의 정치와 거의 동의어가 된 탕평책에 대해 김자현 교수는 “한국학계의 탕평론은 끊임없이 유해하기만 한 붕당론에 대항하여 쓰였고, 그 붕당론은 종국에 왕조의 멸망을 이끈 타성과 혼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차라리 영조가 붕당정치의 대안을 모색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유용할 것임을 지적한다. 또한 “사도세자는 영조의 성군상을 향한 갈망과 정당성 입증을 위한 열망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며 이 사건에 대해서는 극도의 주의와 종합적인 그림이 필요함을 강조하며 사건의 실체에 다가선다.
김자현 교수는 마르티나 도이힐러(런던대), 존 던컨(UCLA)과 함께 서구의 한국학 2세대의 선구적인 인물로 꼽힌다. 중국과 조선의 비교, 사료의 발굴과 활용, 시공을 넘나드는 빼어난 수사력 등 이 책이 지닌 장점은 이화여대에서 영문학, 미시간대에서 중국문학, 컬럼비아대에서 한국역사를 전공한 공부 이력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은 서구 한국학 연구의 입문서로 유명하다. 미스코리아 한국일보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향년 69세로 별세했다. 최근에 나온 유고집으로 The Great East Asian War and the Birth of the Korean Nation(2016 컬럼비아대출판부, 2018 너머북스 출간예정) 이 있다.

조선시대 유교적 군주상과 왕권
조선시대 국왕의 권위는 다른 무엇보다도 더 이상적인 유교적 군주상의 수사에 기초했다. 성인군주의 개념과 수사를 공유했던 중국의 황제가 천자(天子)로서 거의 신화적 영역에 봉인된 가운데 아무런 제재 없이 스스로 성인군주라는 수사를 자신의 이미지에 이용할 수 있었다면 조선의 왕들은 매우 다른 상황이었다. 천자도 아니었고 제국의 통치자도 아니었다. 환관이나 종친, 외척 등의 친위부대도 없었다. 조선의 국왕은 조선 인민들의 대표일 뿐이었다. 중국의 천자와 조선의 국왕을 비교하는 저자는 무엇보다도 조선왕조에서 국왕이 성스러운 수사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고 본다. 관료 사대부 또한 권력 기반과 함께 유교적 유산에 대한 고유의 주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왕들이 영조처럼 성군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왕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고자 한다면 더 높은 도덕적 기대 수준을 충족해야했다.
저자는 왕과 관료의 치열한 경쟁이 적어도 668년 신라의 통일부터 한국의 정치형태로 특징지어졌지만 유교혁명이었던 조선왕조 개창 이래 16세기 조정의 유교화와 더불어 최소한 수사적으로는 도덕적 우월성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었다고 말한다. 양측은 유교적 기준 아래에서 존재 이유를 찾아야 했다. 통치자에 대한 관료의 충성은 여전히 강조된 반면에 왕의 도덕적 조언자로서 그들의 조언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특히 숙종 초부터 경종 말까지 50년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정치적 갈등의 시기로 영조가 물려받은 '왕이라는 유산'은 그야말로 취약했고 더욱이 영조의 출생이라는 정통성의 결함과 경종 시해 혐의 앞에서 왕의 권위와 권력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방식을 찾도록 하였다. 그 대안이 곧 도덕적 군주상의 수사였고 영조의 성학 추구가 만들어진 배경이었다.

전통과 최고위 사제이자 위대한 도학자, 그리고 전범(典範)
영조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덕치’에 관한 레토릭 밖에 없었다. 성학을 추구하는 정신,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과 진정한 헌신을 강조하는 수사를 주도면밀하게 고수하는 것이 영조의 이미지 구축 방식이었다. 도덕적 권위가 가지는 힘은 관료 사대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붕당 간 대립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조차 반대 붕당의 일원에 대한 사적인 암살 기도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단적인 사례처럼 이는 유교 왕정의 정치 문화였다. 그러나 덕치로 이뤄지는 선정은 군주에게 부여된 것이기 때문에 관료들도 인정해야만 했다.
영조는 최고위 사제이자 위대한 도학자, 그리고 전범(典範)이었다. 의례 준수는 영조를 하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이자 왕조의 통치권을 전수하는 사람으로 상징화함으로써 그에게 유교적 군주의 위상을 부여하였다. 가장 중요한 의례는 제례였다. 영조는 자연 신보다는 역사와 관련된 제례에 관심을 더 두었다. 의례의 의미와 효과에 대한 잠재적 손익을 확실히 파악했던 것이다. 청과 관련된 필수 의례를 엄수할 때 영조는 치밀하고 정확하게 대처했지만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대신 대보단에 명의 홍무제와 숭정제의 합사를 관철시키면서 당시 절대 선과 같았던 재조지은을 이용해 조선 왕실을 명의 상징적 계승자이자 문명의 수호자로서의 위치를 관료들에게 각인시켰다. 명과 청에 관한 위신과 권력의 상징 사용을 왕의 특권이라는 점을 확고히 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영조는 중국에서 제공한 모든 기회를 향유했지만, 중국의 계보에서 벗어나 있는 토착왕조의 태곳적 시조 즉, 단군, 기자와 삼국의 시조 등에 제사를 지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정통을 이은 신라와 고려 왕조에 대한 제사였다. 조선의 독립적이고 내적인 정통성의 상징을 찾는 데 여전히 상당히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의 창업주인 태조에게 특별한 존숭을 표했지만 선대 20명의 왕들 중 선조, 인조, 효종을 특별히 예우했다. 그들은 자신과 같이 모두 성인이 되어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왕좌에 올랐으며, 자신도 그러한 의례의 전통에서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신료들의 많은 반대에도 사친인 숙빈 최씨를 왕비에 준하는 위치까지 추숭할 수 있었다. 사친에 대한 추승은 영조의 출신상의 약점을 보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경연에서 왕의 역할은 잠정적으로 이중적이었다. 왕은 학생이었지만 스승도 고전에 관한 한 학생이었다. 그러므로 왕은 학문적으로 스승과 경쟁할 수 있었다. 국왕의 스승은 두말할 필요 없이 바로 임금과 국정을 함께 운영하는 신하였다. 경연에서 누가 더 성인을 잘 이해했는지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관료들이 알아챌 때쯤엔 영조는 이미 그 경기에서 훨씬 앞서 나가고 있었다. 관료들은 시작할 때에 우세했으나 후반전에는 단지 구경꾼으로 조연을 맡았을 뿐이었다. 재위 20년부터 영조는 학생에서 군사(君師), 즉 임금이자 스승으로 탈바꿈했고, 30년부터는 스스로 성인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영조는 유교적 군주에게 부여된 도덕적 요구를 감수함으로써 군주의 권위를 되찾으려 노력했다. 결국 영조는 성인군주를 추구하는 데 자기 생애를 바쳤는데, 이는 한 인간으로서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했는지에 따른 것이기에 영조가 성학을 추구한 것은 그의 사고방식이자 동시에 시대정신이었다.

유교적 통치의 수사, 영조의 군부일체론
최고위사제, 학자, 전범(典範)과 같은 다양한 역할의 주된 목표는 현실적인 정책 시행에서 관료들에게 도덕적 우월성을 세우는 데 있었다. 이 책은 영조가 사회정책을 시행하는 데 유교적 통치의 수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조가 판단하기에 양역변통(균역법)보다 시급한 것은 없었다. 양반은 양역(良役)에서 면제되었는데, 이것이 국가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백성에게 부담을 지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양역문제는 양반이 단순히 면세되었을 뿐 아니라 면세층의 절대적인 숫자와 인구 중 비율이 모두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왕에게 세제개혁이 중요했던 만큼 관료공동체에도 세제를 종전대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관료들이 개혁에 저항한 것이 이를 반영한다. 이것이 숙종이 심지어 권위주의적 접근으로 몇 차례나 시도했는데도 개혁에 실패했던 이유였다. 양역개혁은 군주의 평등주의적 접근과 관료의 위계질서적 접근이라는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명백한 사례였다. 국가에 양반 계층이 필요하고 국가가 그 특권을 인정했다고 할지라도, 이해관계가 국가와 상충될 때 국왕은 전체 백성의 안녕에 호의적인 수사를 찾아서 계층을 뛰어넘어야 했다.
영조는 숙종대의 실패를 거울삼아 좀 더 치밀하게 준비했다. 1728년(영조 4) 무신란으로 상당히 타격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테면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것이 군부일체론이다. 영조는 군부, 즉 '백성의 아버지'로서 직접 백성들과의 만남을 추진했다. 영조 25년, 영조는 세자와 함께 홍화문에 나가 백성들을 만나고 곡식을 나눠주며 '대중적 지지' 확보를 위한 첫걸음을 떼었다. 관료들은 영조의 행동에 대해 의문이 들었지만 반대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영조 26년, 대기근과 유행병이 발생했다. 위기는 양역변통에 대한 재논의를 촉발시켰다. 반대가 나올 틈이 없이 시행 방법이 결정되었다. 일정을 재촉해 영조는 백성들을 만나 균역법 시행에 대해 설명했고 지지를 호소했다. 균역법도 백성들의 지지도 모두 유교적 이상의 구현이었다. 이를 거부하는 것은 백성에 대한 배신이었고, 유교적 이상에 대한 도전이었다.

장엄한 조와, 왜 탕평이었던가?
왜 탕평이었던가? 저자는 관료사회의 붕당적 측면이 영조 대에 왜 갑자기 문제가 되었는지 직접적인 질문을 던진다. 붕당론은 영조 이전 수십 년 동안 조선 정치의 일부분이었다. 예컨대 정치의 대가 숙종은 붕당이 자신에게 유용할 때는 붕당을 권장했고, 그렇지 않을 때는 막았다. 영조가 붕당이라는 악에 맞서 뒤늦게 싸우려고 노력할 때까지 조선의 왕들이 이를 막고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저자는 믿기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면 영조에게 붕당은 왜 어떤 것이 문제였을까? 탕평책을 주장한 영조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17세기 조선에서는 예송논쟁을 두고 서인과 남인으로 갈라졌고, 숙종과 경종을 거치며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했다. 경종 사후, 영조의 왕위 계승을 두고 노론과 소론은 격렬히 대치했다.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은 영조에게 경종 독살의 혐의를 씌우고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영조 대 붕당의 핵심은 소론이 주장하는 경종 시해 혐의와 영조의 왕위 계승 정통성 문제, 노론이 주장하는 신임사화의 의리와 소론에 대한 처벌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경종 2년 역모혐의로 노론 4대신을 처형한 이른바 신임사화의 옥안에 영조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과거는 묻혀 있지 않았다. 경종 시해 혐의는 괘서 사건에 이어 무신란(영조 4년, 이인좌의 난)으로 폭발했고, 52년이라는 긴 재위기간 내내 과거의 무게감은 영조를 짓눌렀다. 노론의 집요한 요구였지만 자신의 경종 시해 혐의를 벗기 위해 소론을 처단하는 것은 선왕을 부정하는 것이며, 이는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영조는 과거를 덮을 수밖에 없었고 나이가 들수록 그의 마음에 사도세자가 부왕의 억울함을 풀어줄 탈출구이자 해결책으로서 더 크게 떠올랐다.
노론과 소론이 양극단에서 분열되었고 국왕과 관료가 최전선에서 충돌하는 형국에서 붕당정치는 영조에게 이점이 없었고 거의 불가능했다. 영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왕의 도덕적 이미지였다. 간청하고 회유하고 분노하고 울고 설득하고 훈계하는 가운데 이른바 장엄한 조화, 탕평책을 가시화 했던 것이다. 영조는 아무리 비위가 거슬리더라도 탕평책을 실행하는 데는 자신의 이미지를 완전무결한 도덕적 통치자로 타협해내는 것이 필요했다. 이러한 이미지가 탕평책과 상충되었을 때, 그는 통치 방법에 따라 역할을 조정해야 했다. 이 책은 영조가 어떻게 그것들에 영향을 미쳤고, 한 인간이자 군주로서 어떻게 그것들을 바꾸어나갔는지 디테일하게 기술하고 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성군상을 향한 갈망과 정당성 입증의 열망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이었다
영조는 자신이 곤경에 처할 때마다 사도세자를 거론하며 양위라는 위협 수단을 활용했는데 두 가지 방식이었다. 탕평정책에서 영조가 붕당의 요구를 침묵시키는 것이 필요했을 때, 간언을 굴복시키는 데 선위를 사용했다. 그리고 경종 시해 혐의를 씻으려고 했을 때도 전위를 이용했다. 경종 독살설이 조정을 뒤덮은 영조 28년, "내가 이 옷을 벗지 않는다면, 죽어서 황형을 무슨 낯으로 뵐 수 있단 말이냐?"며 영조는 선위 소동을 벌였다. 영조의 선위 위협, 세자와 관료들의 간청, 그리고 왕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모후의 간청 등의 순서로 이어지는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이는 '효'라는 주제로 회귀했다.
진실로 무엇이 영조로 하여금 자신의 유일한 아들을 죽이게 했는가? 저자는 '임오화변'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실록』『한중록』『이광현 일기』등 당시 정황을 전해주는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 실체를 풀어간다. 신임옥사에서 훼손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은 압박 속에 있었지만 탕평책을 위태롭게 할 수 없었다. 균역법도 완성해야 했고 더욱이 아들에게 직접 지시하여 욕망에 굴복하는 사적인 아버지가 될 수도 없었다. 사도세자는 부왕이 시해 혐의의 해소에 관한 바람을 표현하지 않는 한 탕평책을 위반할 수는 더욱 없었다. 영조와 사도세자는 공적인 사람으로서 직분을 다해야 하는 도덕적 제한 때문에 사적인 아버지와 아들로 소통할 가능성마저 효과적으로 제거당하고 말았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단번에 자신의 굴욕을 되갚아주는 사적인 아들이자, 공적인 왕위계승자인 동시에 미래의 성인군주가 되기를 원했다. 지위에 얽매인 영조는 효라는 수사를 통원해 이 같은 요구를 했다. 이렇듯 불가능한 요구에 직면한 사도세자는 그러한 역할에서 도피하려는 다양한 시도로 반응했다. 결국 영조는 비극적이고 잔인한 행동에 기대야 했고, 인본주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해야 했다. 이 사건은 영조가 개인적인 삶과 통치 사이에서 직면했던 모순 그리고 사회적 요구를 충족하려고 매우 노력했던 긴장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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