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토마스 모어의 관심이 사회개혁에 있었다면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의 관심은 궁핍과 빈곤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있었다. 베이컨이 볼 때,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은 사회제도의 개혁보다는 과학의 발전에 의해 가능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파악하여 자연을 지배하고 자연을 이용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올바른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올바른 방법을 발견하여 적용할 때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혁신되고 자연의 숨은 비밀이 밝혀져 사회 진보가 촉진된다.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1620)은 바로 사회진보를 가능케 하는 올바른 과학적 방법론이 무엇인가를 추구한 책이다. 베이컨의 학문적 포부는 그의 『대혁신(Instauratio Magna)』에 잘 나타나 있다. 『대혁신』은 기존의 지식체계를 완전히 개편, 재조직하려는 거대한 계획이다. 『대혁신』은 6부로 계획되었는데 제1부에 해당하는 것이 『학문의 진보』이고 제2부에 해당하는 것이 『신기관: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지배에 관한 잠언』이다. 『신기관』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은 130개 장(章)으로 완성되었으나 제2권은 52장으로 미완성 상태로 그치고 있다.

베이컨에 의하면 학문의 진보를 가로막는 근본적 요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간의 정신과 감각의 불완전성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의 나쁜 전통과 방법론 때문이다. 전자와 관계된 것이 우상론(偶像論)이라면 후자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귀납법이다. 베이컨이 볼 때, 학문이 오랫동안 침체의 늪에 빠진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간의 자연지배권이 상실되고 인간과 자연이 유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학문의 새 출발은 인간과 자연의 본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인간 본성에 내재한 나쁜 경향, 또는 오류의 원천이 우상이다. 베이컨은 우상을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으로 구분한다. 학문의 진보를 위해 우상은 반드시 파괴돼야 한다. 우상의 파괴는 인간의 마음이 편견과 선입관, 독단과 억측으로부터 해방되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상태로 되돌아 갈 때 가능하다. 그러면 순수한 마음을 유지해 주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귀납법이다. 귀납법은 경험적 방법과 합리적 방법, 실험적 방법과 이론적 방법을 결합하여 감각적 경험과 이성이 서로 보완해 주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통해 인간은 물자체(物自體)에 접근하여 '형상'(形相)을 발견할 수 있다. 형상이란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과 속성, 그리고 이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형상만 발견할 수 있다면 자연의 신비는 쉽게 풀리게 된다. 이제 인간은 자연현상을 임의로 분리 해체하고, 다시 그것을 결합 조립하여 원하는 대로 개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인간의 힘이 무한히 증대될 것이고 새로운 발견과 발명이 홍수처럼 쏟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연의 진행과정에서 벗어나서 희망하는 낙원을 이 지상에 건설하게 될 것이다.

『신기관』 제2권은 가설의 수립과 검증과정을 '열'(熱)을 예로 들어 장황하게 설명한 책이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학생들은 제1권만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베이컨의 방법은 가설과 연역적 방법의 중요성을 경시하였고 수학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이같은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귀납법과 과학철학은 근대과학에 기여한 바 크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을 대체한 새로운 방법이 발견될 때 학문이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 진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베이컨이 자신의 방법론을 'Novum Organum'이라고 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Organon)』을 능가하는 새로운 방법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 점에서 Novum Organum은 『신기관』보다는 『신논리학』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국내 번역서로는 한길사에서 출간된 『신기관』(진석용 옮김)이 있다.